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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코리 Oct 07. 2019

휴직을 연장했다

아직 손실 혐오의 병을 치유하지 못했다

6개월의 휴직 기간이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처럼 지나갔다. 복직 전날에는 마음이 뒤숭숭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휴직한 이유에 대해 넋두리했던 브런치 글을 다시 읽으며 그때 하고 싶었던 일들을 충분히 누렸는지 돌이켜봤다. 달콤한 휴식을 맛보았지만 '이제 회사의 사다리에서는 밀리는 일만 남았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나중에 2개의 마시멜로를 한 번에 받을 수 있었는데..


(동의할 수 없는 실험이지만) 성공적인 미래를 예측하는 지표인 마시멜로 인내심 테스트에서 나는 통과하지 못한 실험군인 것 같았다.


손실 혐오, 자신이 얻은 이익보다 손해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집착하는 심리.
- 대니얼 카너먼


평생 고질병처럼 쫓아다니는 '손실 혐오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이들과의 즐거웠던 추억, 마음껏 들었던 강연들, 투잡으로 벌어들인 수익 등은 온데간데없고 앞으로 회사에서 잃을 것들만 계속 떠올랐다. 가족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지만 복직이 다가올수록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고질병은 나를 괴롭혔다. 쉴 때는 매일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막상 돌아가는 나는 여전히 내려놓지를 못했다.



소처럼 밭에서 일만 하다 가는 인생이 두려워 휴직을 했는데, 이제 그 기간이 끝날 때가 되니 가지 않았던 '휴식 없는 소의 길'이 아쉬웠다. 흔들리는 마음에서 내공의 부족함을 느꼈고, 생각이 오락가락하여 주화입마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러다 휴직 중에 참여했던 시를 읽는 수업이 떠올라 '가지 않을 길'로 유명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다시 읽었다.


노란 숲길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
- 로버트 프로스트


시를 읽는 수업에서 배웠던 대로 천천히 소리 내서 시를 읽고 느껴지는 생각을 글로 적었다.

 

휴직을 이미 했으니 '휴식이 없는 소의 길'은 이미 갈 수 없는 길이 되었구나.


복직을 하는 이 순간 나는 또 다른 두 갈래 길에 있구나.


문득 생각의 관점이 과거에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왔다. 이대로 복직을 하면 나는 무엇을 놓치게 될까? 지난 6개월 동안 해봤던 일들을 하나둘씩 떠올리며 아직 해보지 못한 것들을 생각했다. 걸어오던 휴식의 길을 조금 더 걸어보고 싶어 졌다.



자기야, 나.. 조금 더 쉴까?
(생각보다 무덤덤하게) 왜? 다 못 놀았어?
아니 그냥.. 윤O도 다 커서 명퇴까지 이제 휴직이 없잖아.
그럼 쉬어.
응? 진짜? (이거 너무 쉬운데?)
안 쉬면 나중에 아쉽지 않겠어?


아내는 내가 휴직하고 쓴 브런치 글들이 좋다고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후 단둘이 커피 한잔하면서 영화를 보는 것도 행복하다고 했다. 한적한 평일에 집 주위를 산책하고 사람이 없는 트레이더스에 가는 것도 재미있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생각만 하고 못했던 일을 휴직 기간에 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아내는 일상을 천천히 물들이는 게 좋았다고 했다. 우리는 단 몇 개월만 이라도 이 행복의 길을 계속 걸어보기로 했다.



휴직을 연장하기로 결정하고 며칠이 지나니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이번 휴직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꽤 긴 시간인데 뭔가 하나 이뤄야 되는 것은 아닌가.  회사에서 동기들은 커리어를 향해 전진하고 있을 텐데 나는 밖에서라도 뭔가 이뤄야 하지 않을까. 고민을 하다 보니 휴직을 연장하여 더 여유로워져야 할 일상이 뭔가 불안해 보였다.


요즘 글도 안 쓰고 왜 그래?
나 이렇게 쉬어도 되나. 가장인데...
병이 또 도졌구먼. 한국의 집단 전염병! ㅋㅋ
뭔가 특별한 것을 해야 하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줘. ㅋㅋ


나는 여전히 쉬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휴식은 뼈 빠지게 달린 후에 느끼는 짜릿한 쾌감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소처럼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값진 보상이라고 뇌 속 깊은 곳에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휴직 연장을 하려고 회사에 와서 사물함을 열었다. 금방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치우지 않았던 짐들을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짐을 박스에 넣고 택배를 붙이니 영영 회사를 떠나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나눈 동료들이 월요일 회의로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알 수 없는 소외감도 다시 밀려왔다. 이거 진짜 괜찮을까.


답답한 마음에 휴직서를 제출하지 못하고 사물함에 다시 넣었다. 따뜻한 커피를 받아 잠시 회사 주위를 거닐며 맑은 가을 날씨를 즐겼다. 나무가 주는 산뜻한 공기와 볕을 통해 들어오는 비타민이 마음을 진정시켰다. 문득 휴직 기간에 더욱 가까워진 친구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졌다. 그의 목소리는 항상 그의 체중만큼 안정감이 있었다.


휴직을 연장하러 출근했는데, 열심히 일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니 저만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아 불안하네요.


한참 말없이 나의 이야기를 듣던 그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코리님.. 저도 회사원이었잖아요. 지금 코리님의 선택이 맞습니다. 두고 보세요.


그의 대답은 길지 않았지만,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아무렇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도 나도 무엇이 답인지 모른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지만, 확신에 찬 그의 대답은 그 순간 딱 내게 필요한 처방전 같았다. 잠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휴직서를 제출하고 다시 건물 밖에 나와 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행이다. 주위의 공기가 회사보다 맑아서.
그리고 공기청정기 같은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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