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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코리 Oct 15. 2019

겨울이 오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회사원의 퇴근길 경영기획 


올해 얼마 벌었지? 현재 자산이 어느 정도일까? 내년에는 어떤 사업을 하지?


대부분의 회사는 10월이 되면 올해 어느 정도의 돈을 벌었는지 등의 숫자들을 정리하고 내년에는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각 부서들은 내년에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과 이를 위해 필요한 돈을 요청한다. 요청된 금액은 매번 대폭 축소되어 돌아오기 때문에 때로는 이 금액이 의도적으로 부풀려지기도 한다. 회사의 경영계획을 만드는 부서와 돈을 관리하는 재무 부서는 이를 꼼꼼히 살펴보고 회사의 방향성까지 고민해야 하니 이 시기가 되면 연차는커녕 칼퇴근도 기대하기 어렵다.


신기한 것은 이런 개인적인 희생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직원도 별로 없다. 도리어 회사를 움직이는 의사결정에 자신이 참여한다는 사명감과 지금의 고생이 후에 달콤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런 사람들로만 구성된 수 조직 같은 곳에서 나는 우리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 싶었고, 독서모임에서 책을 읽고 싶었다.



어느 날 아빠를 보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려는 아이와 한참 통화를 한 후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한참 끄적였다. 바쁜 일이 산더미였지만 그냥 잠시 그러고 싶었다. 그러다 옆에서 한참 엑셀을 만지고 있는 후배에게 물었다.


J야, 정작 우리의 올해 성과는 뭐냐. 너는 내년에 뭐하고 싶냐.
저요? 올해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년에는 진짜 이 팀을 떠야죠. ㅋㅋㅋ


매년 이 팀을 떠난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면서도 대부분 인사이동이 시작되면 그대로 주저앉았다. '1년만 더 할까' 하는 생각으로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떠나지를 못했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 그런 거 말고 우리 자신의 경영기획은 없냐고. 구체적인 숫자로 가져와. ㅋㅋ
아.. 진짜 선배. 회사일도 숫자 때문에 지겨운데. ㅋㅋ


그 후 며칠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 번씩 주위의 동료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다. 대부분 여기서 몇 년 하고 나중에 다른 팀으로 가서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은퇴하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떠나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나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회사의 미래와 행복은 이렇게 고민하는데 정작 나에 대한 고민이 없었구나.



왜 그래을까. 회사가 성장하고 행복해하면 나도 같이 행복해질 것이라 착각했을까. 나는 올해 나의 삶을 위해 무엇을 했을까. 내년에는 어떤 신사업을 하고 싶을까. 막상 이렇게 질문을 시작하니 회사의 경영기획보다 더 어려웠다.


명함 떼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를 위한 기획을 시작하니 하루 내내 회사일에 찌들어도 퇴근하는 길이 즐거워졌다.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은 없었지만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해부터 나만의 '퇴근길 경영기획'을 시작했다.




01 내가 결정하는 미래


기획이라는 것을 해야 하니 아주 오래전부터 훌륭한 박사님들이 만들어 놓은 기획의 정의부터 살펴보자.(이런 정의를 보는 것이 은근히 재미가 있다. ㅋ)


기획은 조직의 지도층이 조직의 미래를 결정하고, 조직의 미래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절차와 운영 방침을 개발하고, 그의 성공 여부를 측정하는 방법을 결정하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이다.  
- Goodstein, Nolan, &Pfeiffer, 1992


이제 이 정의를 개인 측면의 기획으로 살짝 수정해 보자.


기획은 개인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고, 자신의 미래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절차와 운영 방침을 개발하고, 그의 성공 여부를 측정하는 방법을 결정하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회사원은 자신의 미래를 주도적으로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미래는 회사가 나를 어떻게 할지에 맡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그것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절차와 운영방침도 개발하기보다는 회사의 시스템 중심으로 구성되기 쉽다. 당연히 그 성공 여부를 측정하는 방법도 회사에서 주는 평가 체계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올해 목표는 성과 '우수' 받고 내년에는 '승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래의 글을 참고하여 타임머신부터 한번 해보자. 


https://brunch.co.kr/@socialbroker/43


02 우선순위 합의


기획에 대한 정의를 하나 더 살펴보자.


전략적 기획은 조직이 그의 임무를 달성하는데 핵심이 되는 우선순위에 대한 합의, 이로써 주요 이해 관계자 간에 실질적 참여를 통해 조직환경에 대응하는 체계적 과정이다.
- Alison & Kaye, 1997


다시 한번 개인 측면의 기획으로 바꿔보면.


전략적 기획은 개인이 원하는 미래를 달성하는데 핵심이 되는 우선순위에 대한 합의, 이로써 가족 등의 이해관계자 관계자 간에 실질적 참여를 통해 개인 환경에 대응하는 체계적 과정이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결정과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과의 합의다. 후배 M은 한참 바쁠 때 M신도시 청약을 미룬 것을 후회했다. 선배 K는 아픈 아이를 돌보지 않고 일만 했던 과거를 후회했다. 때때로 회사는 지금 가장 중요한 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되기도 한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마음이 안 좋으니 회사에 더 오래 있었나 봐.



누구나 회피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깨닫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한다. 회사처럼 제한된 환경에서 주어진 일을 오래 하다 보면 무엇인가 직접 알아보고 사소한 서류 작업들이 귀찮고 심리적인 여유가 없어서 후배 M처럼 투자 활동을 미루기 쉽다. 하지만 자신이 결정한 미래를 위해 그 투자 활동이 높은 우선순위에 있었다면 그것을 놓쳤을까. 아이와의 관계를 후회하던 선배 K의 당시 우선순위는 무엇이었을까?


왜 그 투자 이야기를 내게 안 했어?
그때 했었어. 네가 관심이 없던 거지.


흔히 모든 인간은 인지적 구두쇠라고 한다. 그만큼 정신적 에너지를 아끼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선순위가 없으면 관심이 없는 것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03 생각과 행동 연습


회사 5년 차에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어 히말라야에 혼자 다녀온 적이 있다. 광활한 자연을 걷고 거친 물살에 노를 저으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뭔가 새로운 삶이 열릴 것 같았지만 귀국 2주일 만에 여행 전의 삶으로 회귀했다. 최근에는 휴직을 하고 제주도를 혼자 다녀왔다. 제주도에서 14년간의 회사 생활을 돌아보고 휴직의 이유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제주도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들이키며 '이번 휴직은 일하지 않고 온전히 쉬겠다'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돌아와 2주일 만에 일거리를 받으려다 와이프에게 혼이 났다.


당신 그 정신병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왜 이렇게 철새가 회귀를 하듯 이놈의 일상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 나는 회사가 일을 주지 않으니 밖에 나가서 일을 구하러 다녔다. ㅋㅋ 노동교를 신봉하고 노예병에 걸린 것 같았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 윌리엄 제임스, 심리학자


누가 한 말인지는 잘 모르지만 누구나 한번 즈음 들어봤을 명언이다. 이 문장을 역으로 생각하면 습관을 바꾸려면 행동을 바꿔야 하고 그 행동을 하려면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미래를 그린 후 우선순위까지 정했다면 이제 그에 필요한 생각과 행동지침을 만들 차례다.


나는 올해 아이들을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어.



이렇게 말했던 동료는 퇴근하면서 '미안해, 아침에 보고 부탁해'라는 상사의 말에 본인의 계획을 자연스럽게 내일로 미뤘다. 우선순위까지 정해졌다면 그에 맞는 생각과 행동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평소에 연습이 되어 있어야 한다. '아, 저도 약속이 있는데, 내일 아침에 조금 일찍 나와서 준비해도 괜찮을까요.'라고 자연스럽게 말하고 우선순위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회사에서 찍히면 어떻게 하냐고? 여기서는 이것이 찍히는지 용인되는지 보다는 자신이 알아차리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두자.) 


질질 끌려다니고 나서 합리화하기보다는 미리 인지하고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했으면 좋겠다.




강사님, 다음 학기 저희 학교 강의를 요청드리고 싶어요.


타임머신에 10년 후 대학에서 강의하는 모습을 그린 지 2년 만에 어느 국립대에서 연락이 왔다. 대학에서 정기적으로 강의하는 모습을 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에 제안을 자주 했었는데 그것이 자연스럽게 좋은 기회로 연결되었다. 


와. 선생님! 그거 제가 정말 꿈꾸던 일인데요. 언제인가요?
월수금 오전이요. 
아.. 저 회사원인데요. 
역시.. 안 되겠죠.. 혹시나 하고..
(아니, 이 사람이.. 보이스 피싱을..)


Winter is coming. 곧 겨울이 온다. 회사가 경영기획을 시작할 때면 꼭 자신의 경영기획도 함께 염두에 두자. 특히 회사의 경영을 고심하며 오늘도 야근하는 나의 소중한 후배들이 꼭 해보면 좋겠다. 너희들의 소중한 삶을 놓치지 않고 꼭 붙잡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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