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다시 일을 시작한 후로 세 아이 하원을 도맡고 있다. 퇴근하면 첫째, 둘째 셋째 순서로 데리고 온다. 며칠 전 첫째와 함께 둘째 셋째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가고 있었다. 첫째가 차창 밖을 물끄러미 보다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7살 아들이 죽음이 뭐냐고 물었다.
"아빠, 장례문화원이 뭐야?"
아들이 [한글 용사 아이야]를 보며 한글을 깨치더니 제법 글자를 읽을 줄 안다. 이제 간판을 읽을 정도다. 아직 모르는 글자는 쏙 빼고 말하지만 말이다. 그날 더듬더듬 장례문화원이라고 읽은 것이다.
아들의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설명해야 쉽게 알아들을까. 아이 눈높이에 맞게 설명하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더니 골치가 아팠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유호야, 장례문화원은 죽은 사람과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곳이야."
(나름 설명을 잘한 것 같아 흡족했다.)
아들은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사람들과 인사를 해?"라고 되물었다. 7살 다운 질문이었다. 아들의 다음 질문에 소크라테스가 되어본다. 테스 형, 순간 결혼식장이 떠올랐다. 아들에게 결혼식을 빗대어 설명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하지, 스스로 놀라면서 아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럼 저긴 죽은 사람이 쌓이겠네."
(헉, 어찌 점점 대화가 다큐에서 코미디로 흐르는지 살짝 당황했다.) "3일 동안만 인사를 하고 땅에 묻지, 사람은 죽으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나만 진지한가 싶다.)
"흙이 사람인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아직 죽음을 이해할 수 없는 나이다. 그래도 장례문화원이 뭐하는 곳인지 알지 않았을까. 그 뒤로 장난스럽게 끝난 아들과의 대화를 곱씹게 되었고 나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는 유난히 엄마 아빠가 아플까 봐 걱정을 많이 한다. 어느 날 엄마 아빠가 죽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최근 아내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해 더욱 불안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들이 걱정할 때마다 몸과 마음을 잘 챙겨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건강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통사고를 경험하고 인생은 찰나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아들이 죽음에 대해 물은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매 순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다. 찰나의 순간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선택하길 바란다. 어찌 보면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언제 맞닥뜨릴지 모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장례식장은 어떤 모습일까. 갑자기 내 생애 끝의 풍경이 궁금해졌다. 인생의 마지막 삶은 어땠고,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지냈고, 나의 가족과 친구, 지인들이 모여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까. 대성통곡을 할까. 담담하게 국화꽃을 내려놓을까. 나를 추억하며 웃을까.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추억하고 기억할까.
나의 장례식장을 상상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아이들과 건강하게 헤어질 수 있는 시간이 지금도 흐르고 있다.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이다. 이 또한 희망사항일 것이다. 죽음이 곧 삶이고 삶이 찰나의 순간이라면 오늘 하루 진심을 다해 살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