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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내 이름이 불린 날

by hohoi파파

오늘은 정기 건강검진 날이다. 12월을 넘기기 전에 미뤄왔던 검진을 예약했다. 어영부영하다가는 2025년이 훅 지날 것만 같았다. 해야 할 일들은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자체평가보고서를 교육청에 제출한 뒤라 마음만큼은 한결 가벼웠다. 부랴부랴 공가를 냈다.

돌아보면 건강검진은 해마다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룬다. 여름방학에는 현장점검 때문에 학생 이해 자료와 각종 서류 준비로 여유가 없다. 짧은 방학이 끝나면 9월 역시 순식간에 지난다. "어느새 10월"도 느끼기 전에. 자체평가 보고서를 쓰고 보고하면 11월도 끝나간다. 딱 이맘때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올해도 이제 다 끝났구나."


9시 가장 빠른 시간으로 예약했다. 둘째, 셋째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아내가 출근길에 태워줬다. 지나가는 길,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사거리에 내려줬다. 비바람이 세게 불어 우산은 바람막이에 불과했다. 도로 위 낙엽이 휘몰아치고 빵빠레 아이스크림 뚜껑이 데굴데굴 굴러가며 소리를 냈다.


30분 걸어 병원에 도착했다. 접수 후 손등에 식별 스티커를 붙였다. 알 수 없는 다섯 자리 숫자 바로 아래에 내 이름과 생년월일이 찍혀있었다. 세 번째 줄에 적인 M 42를 보고 "아, 나는 43살 남자였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티커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오랜만에 오롯이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전현승 님, 전현승 님.”


그리고 오랜만에 내 이름을 듣는다.

올 한 해 통틀어 가장 많이 내 이름이 불린 곳이 병원이라니.


탈의실로 안내받아 초록색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이상하게 병원만 오면 긴장된다. 평소 내 몸을 챙기지도 않으면서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두려워하는 나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 어제 위내시경 검사 때문에 8시간 이상 금식해야 해서 저녁을 안 먹으려고 했다. 정말 그랬다.


하필 아는 누나가 집에 놀러 와 푸라닭 치킨을 세프별로 사 왔고 "8시간만 지키면 되겠지" 합리화하며 최후의 만찬처럼 먹어 치웠다. 그렇게 먹어놓고 또 불안해하는 내 모습이 겹쳐지니 참 너란 사람도.


청력, 시력, 키·몸무게, 소변 검사. 그리고 공장 라인처럼 이어지는 혈액 검사. 늘 건강관리협회에서 받다가 올해는 내과에서 받으니 규모가 작아 대기 시간은 조금 더 길었다. 35만 원 건강검진 지원비가 있어 추가로 동맥경화, 심장초음파, 복부초음파까지 넣었다. 2년 전 혈압이 높아 약을 먹기 시작한 뒤라 심혈관 질환 관련 검사는 더 이상 남 일 같지 않다. 대장내시경은 3~4년 주기라고 들었던 기억으로 패스.

나이가 들어갈수록 검사 항목은 늘어만 간다. 국가가 챙겨주는 항목과 더불어. 위내시경은 몇 년 사이 익숙해졌다. "수면마취제 넣겠습니다." 말이 들리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 끝나 어리둥절했었는데 올해는 왜 이렇게 잠이 안 드나 했더니 마취약을 아직 넣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오늘도 결국 "검사 마쳤습니다." 간호사의 말이 들리고 눈을 떠보니 회복실이었다. 마냥 신기하다.


다음 검사 대기하면서 머릿속에 가득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점심은 뭐 먹지?”


이런 날은 나에게 공을 들여야 한다는 쓸데없는 욕망이 고개를 든다. 전날 이미 병원 근처 식당들은 다 검색해 두었다. 날씨와 어울리는 국밥이냐, 환장하고 먹는 초밥이냐. 결정하지 못한 채 병원에 왔다. 병원을 나서면서 위내시경 후 바로 먹어도 되나? 생각이 들었지만 의사 선생님이 아무 말도 안 했으니 죄책감도 없었다.

결국 초밥집으로 향했다. “꼭꼭 씹으면 괜찮겠지 뭐.”

오늘은 더 천천히, 더 음미하며 먹었다. 나를 위한 점심이니까.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들고 동네 카페로 향했다. 내게 허락된 단 2시간. 벌써 20분 후면 둘째와 셋째를 맞으러 나가야 한다. 지금 시간 오후 4시 13분. 그전에 글을 발행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밀려오지만 그럼에도 오랜만에 ‘나만의 시간’을 가져 충만하다.


글을 급 마무리 하며, 생각해 보니 유난히 내 이름이 많이 불린 날이었다. 아빠로, 남편으로, 교육복지사로 늘 누군가의 이름으로 살아내던 나. 오랜만에 "내 이름"을 들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오롯이 나라는 사람으로 불리고 내 몸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참 괜찮은 하루다.


이제 정말 일어서야 한다. 하원차량이 올 시간이자 다시 ‘아빠’라는 이름으로 돌아갈 순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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