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여유 부리다
근무지를 옮기고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출퇴근하는 모습이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늦지 않게 출근하기 위해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늦장 부릴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삶이 여유롭다. 예전과 다르게 하루가 길다. 분명 예전과 같은 24시간인데도 말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 걷는 시간, 버스를 타고 도착할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 버스에 내려 근무지 까니 걷는 시간까지 생각보다 긴 시간이 생겼다.
35분 정도 타는 버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나는 음악을 듣는다. 사실 그 전엔 음악을 듣고 싶어도 듣지 못했다. 그 전 근무지는 걸어서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오히려 출퇴근 길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버스 안은 달랐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오롯이 음악에 집중할 수 있다. 음악에 집중하고 감상할 수 있어 좋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과 만원 버스 안의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음악이야 말로 나의 감성을 돋기 충분하다.
여유가 생겼다. 느려졌다. 빨리 가고 싶어도 택시를 타지 않는 이상 그럴 수 없다. 시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 좋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그 전 근무지는 집 가까운 곳에 있어 오히려 늦게 갔다. 학생 때 집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들이 항상 지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출근 길이 항상 분주했는지 모른다. 늘 쫓기듯 출근했고 쉽게 지쳐갔다. 조금 느려도 괜찮은 것 같다. 느림을, 여유를 즐기고 있다.
주변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 사람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뭔지 모를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사람마다 다른 인생이 보인다.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입고 있는 서로 다른 옷매무새로 자기를 표현한다. 자연스럽게 관찰하는 습관이 생긴다. 관찰하면서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고 사색이 짙어진다. 굳이 할 필요 없어 보이는 생각들 끝에 나를 들여다보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글을 쓸 수 있어 좋다. 역설적이게도 글 쓰기 힘든 환경인 버스 안에서 글 쓰는 시간이 생겼다. 누가 그랬다. 작가들은 아무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릴 때까지 사색한다고. 버스에 내려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가 글을 쓴다고. 버스 안에서 즐긴 사색은 글로 이어졌다. 관찰한 것들을 연결하여 글이 완성됐다. 버스 안은 소재가 있었다. 소재들을 섞어 숙성시킬 시간이 충분했다. 숙성시킨 글은 한 번에 써지기도 했다. 어쨌든 글이 써진다.
조금 느려서 생긴 불편함은 있었다. 불편함도 내일이면 끝난다. 사실 아들의 어린이집 적응 기간 동안 느꼈던 여유였다. 적응 기간이 끝나면 출퇴근 길에 등 하원을 해주기로 했다. 그 덕에 버스가 아닌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 한다. 어쩌면 잠시 동안 누렸던 여유를 반납해야 할지 모른다. 아침마다 전쟁이겠지. 아들과 치를 전쟁을 생각하니 잠시 누린 시간마저 감사하다. 다시 버스 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