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사회복지사 Nov 05. 2018

내가 걷는 길이 곧 유일한 길이야

느리게 걸어도 괜찮아

  오늘은 학생들과 부모와 함께하는 등반(등반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민망하다 산책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산책을 했다. 평소 같으면 내 차로 가든지 인원이 많으면 25인승, 45인승 버스를 빌린다. 하지만 오늘은 버스 타기로 정했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는 것 같다. 이제는 만원 버스에서 출퇴근하는 모습은 나의 일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차가 생긴 뒤로부터 버스 타는 일이 드문드문해졌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타는 버스 안이 반가웠다. 자리에 앉기 위해 사람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일이 불쾌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좁은 버스 안에 옹기종기 모인 인원만 30명이 된다. 어머님들 모두 가방을 하나씩 메고 있다. 가방 안에는 점심에 먹을 도시락이 한가득 있다. 김밥, 라면,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에 가방이 곧 터질 것 같다. 버스 타는 내내 배고파진 것은 기분 탓일까. 배고픔을 참고 열두 정거장 정도 지났을까 40분 정도를 탔더니 건지산 입구에 도착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앙상하거나, 풍성하거나.

  건지산은 질리도록 갔던 곳이다. 전주에 사는 30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소풍 가는 장소로 빠짐없다. 그래서인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오늘 걷는 길은 학부모회 회장님이 추천했다. 내가 항상 가던 길은 전북대 병원 쪽에서 동물원으로 가는 방향이다. 하지만 오늘은 반대편에서 오르는 길이었다. 반대편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가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소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처음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은 호수였다. 새벽안개로 이국적인 느낌마저 들었고 편백나무 숲이 조성되어 아이들과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지산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벌써 가을 끝자락이다. 많은 잎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앙상한 가지에 달랑달랑 힘겹게 매달려있는 잎도 살랑살랑 산들바람에 우수수 떨어진다. 가지에 붙은 잎들도 색이 바래고 바싹 말라 간다. 지금이 지나면 가을도 끝날 것 같다. 잎들이 햇살에 기대어 마지막 빛깔을 내고 있었다.

햇살 비친 잎이 투명하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인생은 빠른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유해서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도 매력 있다. 버스 타는 일은 어쩌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의 최적은 아니다. 차로 가면 가장 빠른 길로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버스는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한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기다림의 연속이다. 차로 가는 것보다 도착 시간이 더 걸린다. 그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경제적으로 봤을 때도 손해다. 그뿐인가 낯선 사람과 좁은 공간에 함께 있어야 한다. 만원 버스, 타인과의 접촉과 냄새는 얼굴을 찌푸리게 한다. 불필요하게 들르는 정거장은 시간만 허비 것 같아 속만 새카맣게 타들어 간다.


  누구보다 빠르게 간다고 해서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어딘지 모르게 조급하다. 늘 누군가를 쫒고 누군가에게 쫓기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치열한 경쟁에서 성과를 내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내달리는 뜀박질이 분주하다. 타인도 사회도 나의 느긋함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느긋한 여유를 게으름으로 비난하고 낙오자로 낙인찍을 뿐이다.


  조급증은 우리 일상에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가장 빨리 나오는 메뉴가 뭐죠?" 주문부터 남다르다. 자신이 시킨 음식이 10분 이상 나오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나도 그렇다. 10분이 넘어가면 애꿎은 시계를 보며 주방 쪽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빨리 달라는 재촉 신호다. 음식이 조금이라도 늦오지면 닦달하고 다그치는 풍경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한다.


  사실 택시 탈 때도 마찬가지다. 예상 시간을 조금만 넘겨도 불안한 시선으로 미터기를 쳐다본다. 내가 아는 길이나 평소 가는 길로 가지 않으면 더 불안해진다. 초초함이 넘어서 그때부터 뭔지 모를 화가 치밀러 오른다. "이 쪽 길이 아닌 것 같은데요", "왜 이 쪽으로 가죠?", "빠른 길로 가주세요."라고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붙들고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을 잠시도 못 참는다. 시간을 그냥 보내는 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 남들보다 느림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느리게 사는 것을 낭비라고 여기고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이라고 치부한다. 

울창한 숲속에서 하늘보기.
나무 사이사이 들어온 햇살 맞으며 산책하기.

  느려도 자신만의 속도라면 괜찮다. 학생들과 산에 가면 인생을 배운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한 길만 있지 않다. 누군가 가지 않았을 뿐 내가 가는 길이 곧 나의 길이 될 수 있다.

  정상에 오를 때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가는 길만 몰두하면 된다. 주변을 살피지 않고 정상을 위해 걷는 방법이 유일하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걸음만 집중하면 빠르게 오를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아는 코스로 가면 헤매지 않고 다음 걸음을 떼기 쉽다.


정상에서의 기쁨은 정상에 오른 그 자체라기보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과정에 있다.


  숨 가쁘게 오르기만 집중하다 보면 놓치는 순간이 많다. 졸졸졸 흐르는 계곡 소리, 산새 우는소리, 살결에 스치는 바람, 바람에 파르르 춤추는 잎, 웅성웅성 산에 오가는 사람 소리,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인사,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꽃, 울긋불긋 타오른 잎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느리게 가는 길, 누구나 가지 않는 길을 걷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새로운 걸음은 결과가 예측되지 않고 내가 가는 길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다. 하지만 누구나 가는 길, 편한 길, 가장 빠른 길만 가다 보면 주변의 소중함을 놓치기도 한다. 어쩌면 나를 살펴볼 겨늘 없이 말이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혼자 산책하거나 차 한잔 마시며 나를 돌아보면 좋겠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은 내가 가는 길, 나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느려도 괜찮다. 나만의 속도를 지키며 주변을 살피다 보면 어느새 종착지에 도착한 나를 발견할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