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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i파파 May 11. 2020

간섭했더니 아이가 청개구리가 됐다

다섯 살인 아들은 어깃장을 놓고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아들은 엄마, 아빠가 해주길 바라는 의존심과 스스로 하려는 독립심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어떨 때는 해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다가 또 어떨 때는 자기가 하겠다고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 무렵부터 아들은 반대로 하기 시작했다.   


아들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웠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아들의 감정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예측할 수 없는 아들의 감정 변화에 휩쓸려 나까지 요동치기 부지기수였다. 감정적으로 대응했더니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누구의 문제인가.


수업 시간에 돌아다니며 수업 방해하는 학생,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분노 폭발하는 학생, 친구들에게 악의적으로 시비를 걸거나 다투는 학생, 갈등을 조장하는 학생, 친구를 따돌리거나 폭력적인 학생, 가출하거나 일탈, 반항하는 등 공동체에 피해를 입히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문제 행동이 있다고 말한다.  


문제아,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게 아니다. 단지 학교라는 공동 안에서 보통 학생들의 행동 범주를 넘어서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아이들을 문제아라고 부른다.


상담과정에서 문제아로 불리는 아이들을 만나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들이 많아 놀란다. 이는 어른들의 섣부른 판단으로 낙인찍은 경우다.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행동에 초점을 맞춰 잘못된 개입을 하고 아이들을 혼내거나 벌을 줄 때 문제 행동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아이의 행동 속에 감춰둔 진짜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다. 어른들의 잘못된 개입으로 없는 문제를 만들고 더 키우는 바람에 괜찮은 아이가 낙인찍히는 것이다.


[엄마가 믿는 만큼 크는 아이] 책에서 문제는 아니지만 적절하지도 않은 행동을 중성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중성 행동에 대해서는 본인의 의지를 존중해야 하므로 아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개입할 권리는 없으며 야단 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공부를 하지 않거나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우 본인은 곤란하지만 부모(공동체)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은 행동이므로 이를 중성 행동으로 규정하고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아이의 의지를 존중하고 야단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신이 선택한 일에 책임지도록 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야단칠 때 아이가 한 행동이 문제 행동이 아닌 경우가 많다.
- 엄마가 믿는 만큼 크는 아이 본문 중 -


우연히 꺼낸 육아 책을 읽다가 한 장 채 못 읽고 덮고 말았다. 그제야 문제는 섣부르게 판단하고 간섭하고 조정하려는 나에게 있구나 알았다. 나는 아이의 어떤 특정한 행동이 눈에 거슬리고 신경이 쓰이는지 생각해봤다. 내가 요즘 아이를 내 욕구에 따라, 감정에 따라 야단치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됐다.

수저질 과제 중인 14개월 둘째

누구의 과제인가. 생각해보면 아이가 어깃장 낼 때는 항상 섣부른 판단과 개입을 했을 경우였다. 아이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과제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끼어들었다가 서로 감정만 소모하고 결국 상처만 입었다. 어릴 때 공부하려다가도 부모님이 TV 그만보고 공부하라고 다그치면 더 하기 싫었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부모님에게 화를 냈었는데. 나 역시 첫째와 힘겨루기 하면서 조금만 기다려주면 서로 윈윈 하는데 그새를 못 참고 한마디 거들다 일만 키웠던 것이다.


부모가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면 독립심을 선물하라.
- 행동을 바꾸고 자존감을 높이는 부모의 말에서 -


아이를 대신해했던 일을 목록으로 적어보라고 해서 적어봤다.


양치질했는지 물어보기
양치질 마무리 하기
세수했는지 물어보기
세수 마무리 하기
응가 뒤처리(화장지로 닦아주기)
학교 가방 챙겨주기
유치원에 입고 갈 올 챙기기
간식 챙겨주기
밥 챙겨주기
가지고 논 장난감 정리하기
읽고 난 책 정리하기
목욕시키기
갈아입은 옷 정리하기


작성한 목록 중에 불필요한 간섭으로 아이가 충분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한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됐다. 아이가 클수록 대신해주거나 공동으로 해야 할 과제, 책임을 점점 줄여야 한다고 하는데. 지금 작성한 목록을 곱씹어 보니 아이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눈에 보였다.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아니 이미 선택권은 아이에게 있었다. 마치 내 몫인 양 착각했을 뿐이다. 교육복지사의 일을 하면서 대부분 학생들의 문제 행동은 부모가 부추기고 기름 붓는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의 말이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면서도. 결국 청개구리가 된 아이를 탓할게 아니었다.   


며칠 전 아이의 선택을 존중했다. 내심 아내와 나는 옷과 어울리는 노란색 신발을 신고 유치원에 가기를 바랐으나 아이가 원하는 검은색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겼다. 자기가 원하는 운동화를 신었을 때 흐뭇해하는 아들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다섯 살인 지금 아이에게 중요한 과제는 혼자서 해보는 것이었다. 실수하더라도 스스로 해야 성장한다는 것을 아들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아이의 과제와 나의 과제를 구분해야겠다. 아이의 선택, 취향을 존중하고 기다려야겠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을 잊지 않기로 했다. 아이의 부정적인 마음까지 껴안을 수 있는 아빠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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