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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사회복지사 Oct 08. 2020

DNA의 힘,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애들이 엄마, 아빠를 쏙 빼다 박았네요.”     


  사람들이 첫째 아들을 보고 영락없이 나를 빼다 박았다며 놀라워한다.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하는 게 치명적인 함정이랄까, 딱히 사람들에게 부정하지 못한다.


  두 아들의 얼굴 변화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달랐다. 가끔 신생아 때 사진을 보고 있으면 누구 아들인가 싶지만 두 아들이 젖살이 빠지면서 숨어있던 아내와 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아내와 나는 서로의 모습을 찾느라 바다. “여기는 오빠를 닮았네!”, “여기는 슬을 닮았네!” 가끔 두 아들을 보며 닮은 곳을 찾기 바쁘다.


  첫째 아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뜯어보면 내 얼굴이 오버랩되어 소름 돋을 때가 있다. 클수록 점점 더 닮아간다는 것이 문제인데.     


  아내는 둘째의 눈을 보고 자기를 닮았고 싫어했다. 가끔 아내는 두 아들이 눈두덩에 살과 쌍꺼풀이 없는 내 눈을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아쉬워한다. 그뿐인가 아내는 저주도 서슴없이 퍼부었다. 아직 젖살에 드러나지 않는 두 아들의 턱을 보고 지금부터 난리법석이다. 아내는 두 아들이 나의 각진 사각 턱을 닮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나도 사각 턱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나도 턱을 돌려 깎아서라도 동그란 계란형이고 싶은데 그게 어찌 내 마음대로 될 일인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닮은 걸 어떡하라고.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닮은 구석을 찾아보기로 했다.   


# 두툼하고 두꺼운 손과 발

  두 아들 모두 엄지발가락이 중지 발가락 길이보다 길다. 엄지발가락은 똥짤막하게 생겼다. 엄지발가락만 봐도 영락없이 전 씨 가문의, 나의 아들이다. 발 길이에 비해 발볼이 큰 것도 닮았다. 아무래도 두 아들도 크면 내가 하는 고민을 똑같이 하게 생겼다. 나는 신발을 고를 때마다 항상 고민했다. 발 길이에 맞추면 볼이 꽉 끼는 느낌에 답답했고 그렇다고 발볼 크기에 맞추자니 사이즈가 실제 발 크기보다 커져서 걸을 때마다 운동화가 헐렁거려 불편했다. 보통 발 사이즈보다 큰 운동화를 신어서인지 몰라도 턱이 있는 길을 걸을 때 앞꿈치 부분이 걸렸다. 그 이유로 신발 앞꿈치 부분이 항상 긁혀있고 더럽다.     


  짤막한 손도 닮았다. 손가락 길이에 비해 손바닥은 넓적하고 크다. 손이 거칠고 두툼하다. 분명 누가 봐도 피아노 치는 쭉쭉 뻗은 고운 손은 아니다. 악기를 다루는 것보다 삽질이 더 잘 어울린다. 허드렛일과 잘 어울릴 머슴 손이다. (아들아, 그렇다고 삽질하지 말고.) 아무래도 두 아들은 손가락이 짧아 악기 배우는 것을 포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타고난 신체적 조건을 뛰어넘을 재능과 노력이 있으면 몰라도.


#토끼 이빨처럼 큰 치아와 삐뚤어진 앞니

  둘째 아들의 아랫니 앞니는 V자 모양으로 두 치아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입 안쪽으로 향해있다. 어찌 V자 모양으로 삐뚤어진 앞니 모양까지 닮았을까. 놀라운 것은 모양뿐만 아니라 토끼 이빨처럼 큰 치아의 크기까지 닮았다. 이것은 아버지, 어머니 유전자를 반반 나눠 가져 간 게 틀림없다. 아버지는 아랫니 앞니 모양이 V자 모양이며, 어머니는 토끼 이빨처럼 큰 치아를 가졌다. 두 아들에게서 부모님의 모습을 볼 때면 실로 유전자의 힘이 놀랍다는 것을 느낀다.


  이왕 찾은 거 더 찾아보자.     


# 절벽 같은 납작한 뒤통수에 비뚤어지기까지

  솔직히 이것만은 닮지 않았으면 했다. 나의 뒤통수는 마치 가파른 절벽 같다. 두발 규율이 엄격한 고등학교 때 이발비를 아끼려고 바리깡으로 6㎜에서 12㎜로 밀고 다녔다. 절벽에 가까운 뒤통수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차라리 짱구가 낫지 짧은 머리는 뒤통수가 동그래야 이뻤다. 그나마 둘째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쯤에는 두발 검사를 하는 학교는 없을 테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슬프게도 둘째는 절벽 뒤통수에 머리도 한쪽으로 비뚤어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살짝 찌그러진 삼각형 모양이다. 신생아 머리는 만지는 대로 만들어진다지만 둘째는 아무리 자는 머리 방향을 바꿔도, 예쁜 두상을 위해 베개를 사용해도 소용없었다. 둘째 머리 모양만큼은 노력으로 DNA를 이길 수 없었다. (아들아, 걱정하지 말아라. 아빠가 살아보니 좋은 점이 있더구나.) 아들도 나처럼 베개가 없어도 평평한 뒤통수 덕에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자지 않을까.

   

# 가늘고 힘없는 머리카락

  절벽 같은 뒤통수만큼이나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또 하나 있다. 어쩌면 두 아들도 이다음에 크면 탈모 고민을 하게 생겼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머리숱이 적고 머리가 훤히 들여다보다. 심지어 외할아버지도. 탈모는 한 대를 건너뛰어 나타난다고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피할 수 없다. (너희들이라도 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리.)     


  어릴 때만 해도 머릿결이 삐죽삐죽, 거칠고 굵었다. 머리숱이 많아서 머리를 자를 때면 항상 숱을 쳤다. 어릴 때 어머니는 좁은 이마가 인상에 안 좋다며 이마가 넓어지게 항상 머리를 쓸어 올리라고 했다. 잘못된 관리가 문제였는지, 어머니의 강렬한 바람 때문인 모르겠으나 이마가 점점 넓어졌다. 머리카락은 세월에, 유전에, 점점 곱슬곱슬해지더니 얇아지고 숱까지 없어졌다.      


  아들아! 의료 기술 발전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보자. 두 아들이 크면 탈모쯤이야 쉽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부디 유전자가 화룡점정이 아니길 빌 뿐이다. 차라리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슬프지만 가끔 아내와 나의 영향을 받는 두 아들을 보면서, 두 아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고 떠날지 생각하게 된다. 


  나도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 아내 지인들이 결혼식장에 와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예식장 입구 하객을 맞이하기 위해 아버지와 내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누가 봐도 부자지간의 모습이었다고. 나 역시 무심코 거울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 모습이 보일 때가 있어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럴 때마다 이다음에 나이가 들면 지금의 아버지의 모습처럼 늙겠지 생각한다.


  두 아들 이다음에 커서 “아빠를 부정할 수 없이 빼다 박았네!” 생각하겠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은 유전자뿐만 아니다. 아무리 기질을 물려받았다 해도 지금의 성격과 가치관은 부모와 함께 살면서, 관계 속에서 닮고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삶의 영향은 DNA보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미쳤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유산은 무엇일까.  

  나는  두 아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텐가.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처럼 유전자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어 물려줬어도 나의 뒷모습은 나의 의지, 노력, 배움에 따라 충분히 달리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38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미 만들어진 성격, 가치관, 삶의 패턴, 부모님의 그림자에 자유로울 순 없지만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잠들어 있는 두 아들을 보며 이다음에 커서 아이들 나의 어떤 뒷모습을 닮아있을까 궁금다. 두 아들에게 어떤 아빠로 기억될까. 친구처럼 편안한 아빠? 꿈을 가진 아빠? 엄마를 사랑한 아빠? 자기를 좋아하고 아낌없이 사랑한 아빠? 적어도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듣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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