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만보 걷는 재미에 빠졌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사뿐사뿐 숨죽여 현관문을 나서는데 걸음은 빠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선다.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 자유로움이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헬스장을 다니고 싶은데 꾸준히 다닐 수 없을 것 같아 엄두도 못 낸다.
학교 운동장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벵벵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생각보다 운동 효과는 크다. 걷는 것만으로 활력이 생길 줄이야. 만보 걷기가 이렇게 좋은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걸었을걸.
예전에는 육퇴 하기 바쁘게 거실에 누웠다. 빈둥빈둥 다둥이 아빠에서 백수로 빙의한다. 누워서 TV부터 킨다. '오빠는 언제 운동해?' 한동안 거실에서 운동 매트를 깔고 운동하던 아내가 자극했다. 그때마다 핑계와 변명으로 '조금만 운동하면 금방 몸이 만들어진다'며 허세와 함께 입으로 운동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
지금 생각해보면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눈에 불을 켜고 냉장고를 뒤적뒤적 뭐라도 먹었다. 과자, 바나나, 핫도그, 가끔 맥주 한 캔이나 막걸리 한 병. 애들 간식을 먹었다고 아내에게 한두 번 혼난 게 아니다. 그때는 어찌나 서럽던지. 하지만 결국 혈압약을 먹게 된 것을 보면 진작에 아내 말을 들을 걸 그랬다.
고혈압 약을 먹은 뒤로 삶이 조금 바뀌었다. 과감하게 지난 삶을 청산...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 건강의 적신호로 떠밀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전 처음으로 만보기 앱을 다운로드했다. '처음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야지'하는 생각으로 6,000 보로 목표 설정을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습관이 몸에 배었는지 아이들이 잠들면 학교 운동장으로 나갔다. 익숙해질 때쯤 목표를 높였다. 어디 한번 해보자, 만보. 그때는 혈압 수치를 하루빨리 낮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혈압 수치에 살짝 멘붕이거든. 어쩌면 나에게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미안함을 덜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매일 만보를 걷는 것은 힘들었다. 세 아이를 재워야 하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6,000보든 10,000보든 육퇴를 하고 난 뒤 해야 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다둥이 파파의 만보.
종종 첫째와 둘째를 재우다가 운동복을 입은 채 잠들었다. 새벽에 홀로 눈을 떠 운동복 차림에 씻지 못한 행색을 보고 있자면 현실 다둥이 파파의 모습에 어찌나 짠한지 모른다. 그 순간을 못 버티고 잠든 내게 화가 난다. 이런 정신력으로 무슨 운동을 하겠다고.
또 한 번은 둘째 녀석 때문에 만보를 코앞에 두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창 걷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 들리는 '아빠~ 아빠~' 둘째의 오열하는 소리. 아빠랑 자겠다고 한 시간을 보챘단다. 아내가 버티고 버티다 못해 연락한 것이다. 순간 한숨이 나왔다. 2,000보만 더 걸으면 앱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꽃가루를 뿌려주며 축하해주는데 그 맛에 걷는 것인데 집으로 터덜터덜 걸으면서 어찌나 아깝고 아쉽던지. 둘째를 재우면서 속으로 '아~ 운동하기 힘드네' 한숨만 연거푸 내쉬었다.
지금은 직장에서도 걷는다. 혈압을 낮추는데 매일 10분 계단을 오르면 좋다고 해서 점심시간 때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한다. 10분이면 4,000보는 거뜬히 달성한다. 만보 채우기 위한 차선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만보 걷는 것이 힘든 것처럼 한번 올라간 혈압 수치는 좀처럼 내려올 생각이 없다.
요즘 건강이 곧 행복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이젠 너도 좀 챙겨야겠지?'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그래도 매일 걸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놀라운 변화다. '오늘도 꼭 만보를 채운다'는 이상한 강박이 생겼다. 그마저도 감사할 뿐이다. 정상 혈압 수치를 위해 추워지기 전에 하루라도 더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