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일이면 자가격리가 끝난다. 일주일 동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뒷골이 당기고 오한으로 온몸이 바들바들, 하루 종일 마른기침을 하는데 아이 셋까지 봐야 하니 정신없었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꾸역꾸역 지나갔다. 매일 밤 전역 날만 손꼽으며 쭉쭉 날짜를 긋는 병장의 심정이랄까. 오후 5시가 되면 저녁밥을 챙기는 아내에게 "오늘도 하루가 갔네."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자가격리는 마지막이길 바랄 뿐이다.
지난주 월요일 저녁, 둘째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퇴근하자마자 안아 올린 둘째 얼굴에서 열감을 느꼈었는데...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둘째가 멀쩡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둘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내와 나는 아픈 둘째를 보고 불안했다. 설마 코로나는 아니겠지.
마침 자가 키트가 있었다. 차근차근 설명서를 읽고 긴 면봉을 꺼냈다. 코로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긴장했다. 둘째 코에 넣고 번갈아 열 번씩 빙글빙글 문질렀다. 콧속에 커낸 면봉에 깔때기 모양 튜브에 넣고 휘휘 저어 짜냈다. 용액 통에 노즐을 끼우고 테스트기에 4방울 떨어트렸다. 화선지에 떨어진 한 방울 먹물처럼 검출액이 테스트기 안에서 점점 퍼져갔다. 테스트기를 보는데 어찌나 긴장되던지. 검출액이 퍼지는 동안 설마설마했다.
겸사 결과가 약 15분에서 20분 사이에 나온다는데 둘째는 바로 두줄이 나왔다. 부리나케 온 가족이 자가 키트를 했다. 다행히 모두 음성이 나왔다. 아니 그냥 모두 양성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날 저녁 둘째는 40.1도를 오르락내리락거렸다. 고열로 힘들어했다. 사실 고열은 다른 방법이 없다. 해열제를 먹이고 미지근한 물로 온 몸을 닦이는 수밖에. 밤새 체온을 쟀다. 몸을 닦이다가 그만 둘째 옆에서 잠들었다. 코로나에 옮길지 모르고.
아이가 코로나에 걸리면 온 가족이 걸릴 수밖에 없더라. 사실상 자가격리는 의미 없다. 형제가 많으면 더욱더. PCR 검사 결과 첫째만 빼고 모두 양성이었다. 그렇지만 첫째만 따로 격리해서 맡길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득실득실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했다. 다섯 식구가 7안 동안 자가 격리했다. 결국 혼자만 음성이었던 첫째도 자가격리 마지막 날부터 열이 나기 시작해 양성 판정을 받았다. 혼자 다시 격리 생활 중.
코로나도 함께하면 힘들지 않아요. 부모님이 구세주였다. 자가격리 3일 차, 냉장고가 텅텅 비기 시작했다. 아내도 나도 코로나 증상으로 반찬 만들기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에게 자가격리 중이라고 알렸다. 부모님은 밑반찬을 만들어 그날 오후 바로 반찬을 바리바리 싸왔다. 신선한 갖가지 채소와 , 바나나, 사과, 배 과일을 한 보따리 가지고 오셨다. 1층 베란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진풍경도 벌어졌다.
코로나도 봄도 왔어요. 매화꽃을 보며 7일을 버텼다.부모님은 3일 내내 뭐라도 들고 오셨다. 이사 온 집에 처음 왔으니 이참에 집들이 한셈이다. 1층 베란다 창문 너머로 집 구경시켜드릴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자가격리가 끝나면 제대로 된 집들이를 해야겠다. 어쨌든 부모님의 반찬과 먹거리 지원으로 자가 격리 7일 동안 반찬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코로나는 일상을 멈추게 했다. 하지만 7일 동안 가족을 돌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되었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 걱정해주시며 버선발로 달려오시는 부모님의 사랑을 느꼈다. 손자 손녀와 통화하다 발고 기여코 나를 바꾸라던 아버지. 몸은 괜찮냐고 나 먼저 걱정하시는데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말투가 지금도 생생하다. 코로나가 일상을 빼앗아갔지만 가족의 돌봄만큼은 빼앗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