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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Mar 11. 2021

마음에 행복의 씨앗을 심은 사람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그런 책이 있다. 너무 유명해서 손이 가지 않는 책, 베스트셀러라서 왠지 의심이 가는 책, 제목만으로도 내용이 거의 짐작 가서 딱히 읽어보고 싶은 흥미가 일지 않는 책.  내게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채운 그런 책이었다. 단편이나 마찬가지인 무척 짧은 분량인데도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여태껏 손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은 게 가장 크다. 그렇지 않은가?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니. 제목이 모든 내용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 몇 장 넘기지 않아도 역시, 짐작이 맞네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일 때문에 읽게 되었다.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관심이 딱히 가지 않았던 책. 그러다 보니 심드렁하게 책장을 넘겼다. 처음에는 정말 그랬다. 마치 이 책의 화자이자 장 지오노 본인이라고 볼 수 있는 ‘나’가 ‘엘제아르 부피에’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를 그저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준 평범한 양치기라고 생각했듯이 말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 내가 아닌 여러 사람을 위해, 묵묵히 나무를 심고 그래서 숲에, 마을에 변화를 불러온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장  지오노가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무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나무 심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라고  밝혔듯이,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는 정말 ‘공동 선(善)을 위해 나무 심은 사람의 훌륭한 이야기로군- 제목이 다로군’ 하고 책장을 덮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떤 구절 하나가 뇌리에 콕 박혀서 지워지지 않았다. ‘창조란 꼬리를  물고 새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자신이 할 일을 고집스럽게 해 나갈 뿐이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45쪽) 바로 이 구절. 며칠 뒤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또 읽었다. 어느 순간 숭고한 감동이 밀려왔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삶을 지켜보노라니 살짝 눈물이 맺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감동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감동한 까닭은 그가 여러 사람을 위해 나무를 심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이 작품은 작가를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황폐한 땅에 나무를 심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킨 한 인간의 숭고함에 관한 글이다.


하지만 정말 엘제아르 부피에가 처음부터 모두를 위해 나무를 심었을까? 이 땅과  지구를 바꾸고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달라지게 하려고, 그토록 큰 명분을 갖고서 도토리 100개를 고르고 심고, 그러기를 수십 년이나 혼자, 묵묵히 반복했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커다란 명분은 오히려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타인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은 곧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누군가의 응답을 기대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한 일에 마땅한  응답이나 기대한 반응이 따르지 않으면 곧 지치고 만다.


그런데 나무 심는 행위 자체가 ‘엘제아르 부피’에 그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가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행한 일이라면? 자신이 심은 나무들이 모여서 숲을 이루고 그 숲에서 향기로운 바람을 맞는 일이 그저 자기에게 더없이 큰 행복이었다면? 그래서 그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묵묵히 날마다 수 십 년을 빠짐없이 그 일을 행해왔다면? 나는 어느 순간, 그가 도토리를 고르고 나무 심는 행위를 글 쓰는 행위에 대입해서 읽고 있었다. 도토리는 단어이며, 나무는 문장이고, 그 나무들이 자라서 일군 숲은 하나의 글이었다. 그 글은 소설이기도 하고, 에세이일 수도 있으며, 한 편의 시이기도 하다. 더 많은 여러 종류의 글일 수도 있다.


글 쓰는 행위나 나무를 심고 가꾸는 행위 모두 고독을 벗으로 삼아야 한다. ‘그 사람은 말이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고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차 있고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16쪽) 그러나 고독하되  정갈해야 한다. 실제로 ‘엘제아르 부피에’는 고독을 벗 삼아 살고 있지만 제대로 지어진 집에서 살림살이도 정갈하게 갖추고  살아간다. 혼자이면서도 산뜻하게 면도를 했으며 소박하지만 옷차림은 단정하기 그지없다. 그가 기르는 개조차 ‘주인처럼 조용했으며,  살살대지 않으면서도 상냥하게’ 군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삶을 제대로 사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고독 속에서 양들과 개와 더불어 한가롭게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딱히 할 일이 없기에 죽어 가는 땅의 상태를 바꾸어 보기 위해 시작한 나무 심기. 그 나무 심기가 자기 자신의 기쁨이자 즐거움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흔들림 없이 오래도록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불안을 느끼지 않고 파괴가 아닌, 창조의 기쁨을 날마다 자기 안에 심은 사람. 나는 엘제아르  부피에를 그렇게 본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의 세이모어 번스타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 영화 속에서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작은 원룸에서 일어나 침대 겸 소파를 정돈하는 모습이다. 혼자 살면 침대를 접지 않고 그냥 둬도 될 텐데, 그는 굳이 침대를 접어서 소파로 만들어 놓는다. 집안을 말끔하게 정돈하고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는 그런 생활을 평생토록 이어 온 것이다. 혼자 있지만 언제나 정갈한 주변, 날마다 노트에 기록하는 음표 하나하나, 그리고 그 음들이 만들어 내는 피아노 소리. 그 음표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도토리 한 알 한  알이기도 하고 그 음표와 도토리는 내게 단어 하나하나로 다가온다.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의 한 장면. 이 작은 공간이 세이모어 그에게는 지상의 천국이다.


나무 심은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도,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도 내게는 이 덧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더없이 행복하게, 제대로 잘 살다 가는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어떤 응답을 바라고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 묵묵히 걸어간 길.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삶이기에 가능한 마음의 평화. 그런 삶 속에서 인간은 파괴가 아닌, 창조의 아름다움을 터뜨릴 수 있는 게 아닐까. 도토리가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듯, 나 또한 단어 하나하나를 심는다. 그 단어가 문장이 되고 숲에서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 같은 글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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