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 작품을 좋아해도 헤밍웨이 그를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작품만 알았을 때 더 좋은 작가에 속했다. 물론 이제 와서 인간 헤밍웨이를 안다고 말하기에는 어쩌면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것도 아니며 오랜 세월 그를 지켜본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을 곁에 두고 오래 보더라도 때로는 그 사람의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하물며 글로 멀찍이서 만난 사람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더욱이 그는 동시대인도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최근에 헤밍웨이를 조금은 다시 보게 되었다. 그를 인간적으로 전보다는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 이런 면이 있었으니까 그가 그런 소설들, 그러니까 <노인과 바다>라든지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같은 그런 작품을 쓸 수 있었을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순전히 <더 저널리스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이 책 한 권 때문이었다. 헤밍웨이는 잘 알다시피 기자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로서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어찌나 기뻤던지, 나오자마자 주문했던 것 같다. 그만큼 나는 어떤 면에서는 헤밍웨이 글을 무척 좋아했다. 소설이 아닌 그가 언론인으로서 쓴 글들을 볼 수 있다는 데 어찌 서둘러 읽지 않았으랴.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인간 헤밍웨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단지 그의 글을 좋아할 뿐이라고 말해왔으면서도 사실은 인간 헤밍웨이의 어떤 면은 좋아하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살짝 들기도 한다.
헤밍웨이의 글은 단문으로 깔끔하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모두 한다. 그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그가 기자로 활동하면서 얻은 아주 좋은 글쓰기 습관임을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안다. 그러니 그가 쓴 기사들은 더더욱 깔끔하면서도 정확하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런 글들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와는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위트 넘치고, 소박한 문장에 풍자와 해학이 담겨있다. 어떤 대상에는 한없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문장은 절대로 질척거리지 않는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니, 하, 대단하다.
모든 글이 그렇겠지만 겉보기에만 빼어나게 아름다운 글은 매력이 그리 크지 않다. 문장만 미문이라고 그 글이 정녕 아름다울까? 거기에 제대로 된 생각이 담겨 있을 때 글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기자 헤밍웨이가 쓴 글들이 바로 그랬다. 신변잡기나 당시 사회를 가볍게 다룬 기사 속에서도 사회의 부조리함을 꿰뚫어 보는 그의 통찰력은 빛난다. 헤밍웨이가 신참 기자 시절에 쓴 ‘시장님은 왜 경기를 안 보고 유권자들만 챙기나’라는 글에서는 복싱 경기장에 굳이 찾아와서 유권자 관리에만 힘쓰고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시장을 풍자한다. 그런데 이 풍자는 저속하지 않다. 유쾌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글을 읽게 되는데, 그런 가운데 시장으로 대변되는 사람들(유력 정치가)의 판에 박힌, 진정성이 결여된 모습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가식적인 정치인을 비꼬는 글을 시작으로 사회 비판적인 글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불평등과 부조리함에 분노했으며 무엇보다 파시즘과 크고 작은 모든 전쟁에 경종을 울리는 글을 많이 썼다. 아마도 그가 20대에 해외 특파원 자격으로 유럽의 전쟁과 사회상을 보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그리스-터키전 등등 전쟁의 현장에 직접 머문 적이 많아서 그랬는지 그는 전쟁을 그 무엇보다 혐오했다. 이 책에는 헤밍웨이가 직접 찍은 전쟁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이 실려 있는데, 그 글과 사진은 몹시 충격적이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프다. 전쟁 미치광이들이 부디 이런 글과 사진을 보고 뭐라도 좀 느꼈으면 좋으련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다. 하긴 그런 사진이나 글을 보고 뭔가를 느낄 줄 아는 이들이라면 전쟁을 벌일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파시즘을 경고한 글들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은 무솔리니에 대한 글이었다. 뒷날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무솔리니가 일개 신문사의 편집장이었을 때, 헤밍웨이는 기자로서 그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헤밍웨이는 그 탁월한 통찰력으로 눈앞의 인물이 갈등을 끝낼 인물이 아니라 또 다른 전생을 불러올 수 있는 인물임을 경고했다. 그러면서 무솔리니가 얼마나 한심하고 허풍쟁이인지를 글로서 낱낱이 까발린다.
무솔리니는 유럽 최고의 허풍쟁이다. 무솔리니가 내일 아침에 당장 나를 끌어내 총살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허풍쟁이라고 부를 것이다. 총살하겠다는 것 자체가 허풍일 테니. (.....) 자신의 변변찮은 생각을 현학적인 단어로 치장하는 그의 천재적 재능을 연구해보자. 일대일 결투를 선호하는 그의 성향을 분석해보자. 진짜 용감한 남자라면 굳이 일대일 결투에 나설 이유가 없다. 겁쟁이들이나 끊임없이 일대일 결투를 벌이며 자신이 용감하다고 믿으려 드는 것뿐이다.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와 흰색 각반도 살펴보라. 아무리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위해서라고 해도 검은 셔츠에다 흰색 각반을 받쳐 입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 없다. (‘유럽 최대의 허풍쟁이, 무솔리니’, 112~113쪽)
무솔리니의 아들들은 공중에서 전투를 한다. 거기엔 머리 위에서 총을 겨누는 적군이 없다. 하지만 가난한 이탈리아의 아들들은 땅에서 싸우는 보병이다.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의 아들은 언제나 보병인 것처럼 말이다. 이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 왜 그러한지 깨닫게 되기를. (‘아프리카에는 독수리가 난다’, 207쪽)
헤밍웨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해 솔직하고도 사실적인 글을 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글을 쓰려면 먼저 인간을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글로 풀어낼 줄 알아야 하는데 한평생을 바쳐도 둘 중 하나를 제대로 배울까 말까 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헤밍웨이는 인간을 이해하고 그것을 글로 풀어낸 드문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헤밍웨이의 기사에서 곧잘 등장하는 주제는 ‘무엇이 공정한가’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의식이 없는 이들은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저널리스트로서 헤밍웨이는 적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글로 썼다. 그러므로 그가 쓴 글은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읽는 이들이 여러 번 곱씹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사회의 온갖 부조리에 맞서 진실을 고발하고자 했으며, 전쟁의 참상을 전함으로써 인간이 또다시 전쟁과 파시즘이라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글을 썼다. 또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편에서 그들의 삶이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가 소설 속에서 (또는 실제 삶에서) 매우 마초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찌질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할지라도 그가 이러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도저히 싫어할 수만은 없어진다.
마지막 장 ‘작가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청년에게’를 통해 헤밍웨이가 청년에게 해준 말들을 읽다 보면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푸근한 선생님 같은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어쩐지 늘그막의 수염이 덥수룩한 곰 같은 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슬며시 웃음을 짓게 되기도 한다. 그가 그 청년에게 하는 말은 거의가 ‘진실’할 것이었다. ‘진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글을 쓸 것’ 헤밍웨이는 아마도 그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문학 작품은 물론 그의 이 짧은 저널들도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게 아닐까.
헤밍웨이 : 좋은 글이란 진실을 쓰는 거지. (......) 하지만 작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계속 글을 쓰다 보면 결국 가짜 글을 지어낼 수밖에 없어. 가짜로 지어낸 글을 몇 번 쓰다 보면 더 이상 양심적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되지. (.....) 양심을 제외하고 작가가 갖춰야 할 덕목을 딱 하나만 더 꼽으라면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지. 경험으로 배우는 게 많아질수록 더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는 거야. (‘작가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청년에게’, 2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