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알렉시/은총의 일격>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조금은 어려운 이름의 이 작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 또한 이 작품을 쓴 사람으로 그녀를 기억한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어쩐지 선뜻 구미가 당기지는 않아서 여태까지 그녀의 작품을 읽은 적은 없다. 그러다가 <알렉시/은총의 일격>으로 드디어 유르스나르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리 얇지 않은 두께에 실린 두 편의 이야기는 가볍게 도전해볼 마음이 들게 했다. 책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어허라? 나는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책을 살 때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는데, 일단 작가의 머리말을 읽으면서 아, 이런 내용이었어? 하고 살짝 놀랐다. 전혀 뜻밖의 내용이랄까. 그러고 나서 읽기 시작하니 그 서술법에 또 한 번 놀란다. 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알렉시’의 머리말에 앙드레 지드의 <코리동>을 언급한다.
‘알렉시 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는 1929년에 출간되었다. 문학과 관습에서 그때까지 금지의 낙인이 찍혀 있던 한 주제가 수 세기 이래 처음으로 온전히 글로 표현되었던 시기이다…. 예전에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주제가 오늘날 문학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의도적으로 이용되기까지 하면서, 완전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의 권리를 획득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이라 해서 알렉시의 내밀한 문제가 예전보다 덜 고통스럽고 덜 비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이 머리말을 읽고 대충 감이 잡히는가? 그렇다. ‘알렉시 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는 어느 동성애자의 고백이다. 그것도 완전히 내밀한 고백. 알렉시는 아내 모니크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로 그는 아내에게 이제까지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성적 취향이나 그로 인해 괴로웠고 고통받았던 삶을 조용하지만 담담히 고백해간다. 한 가지 매우 특이한 점은 이 소설에는 단 한 번도 ‘동성애’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는 동성을 사랑했다는 단어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는 그의 고백을 읽어나가면서 알렉시의 내밀한 삶을 고스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상당히 매혹적이다. 독자는 알렉시의 아내 모니크의 입장에서 그의 편지를 읽게 된다. 누군가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 이토록 진솔하고도 절절한 편지를 써 보낸다면 그가 하는 고백이 어떤 내용이든 무척 마음 아플 것 같다. 하물며 함께 살았던 아내라면 자신의 성적 취향의 자유를 찾아 떠나야겠다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 그 마음이 어떨까. 그저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까? 알렉시의 편지를 읽노라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이 섬세하고 나약한 영혼이 숨 막힐 듯 경직된 사회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사느라 고달팠을까 안타깝기도 하고 한없이 연민이 들 것 같다. 알렉시가 그려낸 모니크라면 분명 그런 심성을 지녔을 듯하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왜 단 한 번도 이 작품에서 ‘동성애’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을까? 그저 에둘러서 ‘본능’이니 ‘기질’이니 ‘성향’ 또는 ‘과오’ ‘죄’ ‘악덕’ ‘위반’과 같은 단어들로 동성애를, 알렉시의 성적 취향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이토록 불명확한 서술 방식 때문에 자칫 이 남자가 정말 남자를 사랑했다는 소리인가? 진짜 동성애자란 말인가 아닌가?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빗대어 표현하는 걸까? 독자조차 헷갈리기도 한다. 아마도 그 어떤 이유로도 그 금기의 사랑을 직접 말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머리말에서 유르스나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변을 주의 깊게 바라보기만 해도 알렉시와 모니크의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육체적 욕망의 현실이 금지들로 가로막혀 있는 한 앞으로도 이어질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금지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언어의 금지일 것이다. 언어 속의 장애물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리하거나 큰 거부감 없이 교묘히 피해 가지만, 양심적인 사람들과 순수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 장애물에 걸려든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언어가 없음을, 언어조차 금지되어 있음을, 그들의 언어가 아닌 이성애자들의 언어로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결국 장애물 또는 덫에 걸리고 마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지.
이 기나긴 편지의 마지막 또한 무척 진솔하게, 그렇기에 가슴 아프게 끝맺는다. ‘당신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토록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것에 대해서, 당신에게 사죄하리다.’라고. 알렉시 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 자신의 도덕과의 화해가 부디 성공할 수 있기를 어쩐지 바라게 된다. 이토록 조심스러우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편지라면 그것을 읽는 그 누구라도 그의 투쟁이 ‘공허한 투쟁’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게 되리라.
또 다른 작품 ‘은총의 일격’도 성격이 비슷하다. 이 작품은 에릭과 콘라드, 소피 세 젊은이의 이야기이자,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삼각관계를 말한다. ‘은총의 일격’에도 ‘동성애’라는 단어는 마찬가지로 등장하지 않는다. 에릭이 콘라드에게 빠져있고 그를 몹시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또한 명확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그 감정은 뚜렷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릭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소피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콘라드의 누이인 소피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것이 콘라드를 닮은 그녀이기에, 콘라드의 일부분인 그녀이기에 그러한 것이지 그녀를 여자로서, 또는 연인으로서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소피는 자신을 아끼는 것 같으면서도 이성으로서, 연인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에릭의 모호한 태도 때문에 희망고문을 당하면서 애를 태운다. 그리고 이 어긋난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이 작품을 다 읽었을 즈음에도 ‘알렉시’를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무척 시리다.
<알렉시 / 은총의 일격> 두 작품을 읽고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에게 홀딱 반해버린 나는 집에 있던 창비 세계문학 단편선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프랑스 편>에서 그녀의 단편 ‘어떻게 왕부는 구원받았는가’를 찾아 읽었다. 그리고 이 세 작품만으로 확신이 섰다. 대단한 작가구나! 이 작가를 이제야 읽다니! 하는 심정. 세 작품 모두 고혹적이다. 문장의 깊이나 어조도 우아할 뿐만 아니라 무척 지적이고 서정적이다. 감정을 절제한 서정시를 읽고 있는 기분이랄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도 사두었다. 그녀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보고 싶다. 너무 늦게 만났지만,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몹시도 기쁜 발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