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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속 Mar 21. 2024

남편의 뻔한 편지

그래도 좋은 걸?

  난 편지 받는 걸 좋아한다. 정갈한 글씨체에 글은 길면 길수록 좋고 거기에 나를 찬양하는 내용이면 내 미간 주름을 입가로 옮기는데 충분하다.

  불여우 병히는 이런 내 취향을 연애 때부터 간파하여 선물은 약소하지만 사랑을 눌러 담은 편지로 내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평소 무뚝뚝한 남자가 편지 속에선 사랑을 속삭이니 마음이 간지럽다 못해 울렁거렸고 그의 편지에 홀려 결혼까지 해버렸다. 이 정도면 편지가 아니라 사랑의 주술이었다.

  주술사 병히의 편지는 결혼 후에도 이어졌다. 이혼 고비에 그를 살린 것도 편지였다. 평소 추리소설광에 수능 언어 1등급의 위엄이 어디 가겠나. 구구절절 애절, 애틋한 그의 편지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읽었고 그렇게 미움도 눈물에 흘러가버렸다.

  3월 14일, 화이트 데이에 식탁 위에 편지가 놓여 있었다. 나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담긴 아름다운 편지였다. 감상에 젖어 촉촉해진 마음으로 그동안 남편에게 받은 편지들을 꺼내어 무작위로  읽어보았다.

어라. 뭐지? 흠.. 다른 것도 볼까?

어째 편지 내용이 복붙한 단체문자도 아니고 죄다 똑같았다.


서두

사랑하는 지속이에게 계절에 빗대어 인사

지금이 몇 년도인지 어떤 목적의 편지인지 소개 및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언급


본론

딸들의 성장에 놀라며 희생, 헌신한 나에 대한 고마움과 내 미모 찬양


말미

영원한 사랑 약속 및 앞으로의 계획


  머리를 한 대 얹어 맞은 기분이었다. 이 망할 인간이 연도만 바꿔 똑같은 내용으로 무려 십 년 넘게 편지를 돌려 쓰고 있었다. 아오!!! 내가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F는 이래서 안 된다. 감상에 젖어 이성이 마비되니.

퇴근 후 남편을 불러 앉혔다. 그리곤 그의 천편일률적인 편지 패턴을 언급하자,

"편지 쓰는 게 어디야?! 나 이제 편지 안 써!"

"......"


 접어 두었던 이혼 서류가 어디 있더라....


많지만 결국은 한 장이나 다름없는 남편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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