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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속 Jul 25. 2022

기억의 냄새

 각인된 인물 편

   오감 중 유독 후각이 예민했다. 그래서 호흡과 동시에 훅 하고 들어온 냄새는 장기 기억으로 향하는 프리패스권이었다. 그 티켓을 가지고  생애 속 냄새로 기억되는 이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초등학교 시절 만난 수정이는 성격이 호탕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달리기를 잘해 군살 없는 체형까지 내가 갖지 못한 걸 다 가진 친구였다. 외향적이고 주변은 또 어찌나 잘 챙기는지 열두 살이 아닌 서른두 살의 사회생활 바이브를 가진 아이였다. 그래서 모두가 수정을 사랑했고 나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풍족하게 용돈을 받았던 수정은 하교할 때 친구 서넛을 데리고 문구점으로 매일같이 향했다. 백 원, 이백 원짜리 불량식품을 하나씩 친구들 손에 쥐어주고 빳빳한 천 원짜리를 빨간 지갑에서 꺼내 계산하는 수정이는 빛이었다. 오!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유달리 좋아했던 수정이는 다른 아이들 몰래 주머니 속에 춥파춥스 레몬맛(최애 사탕)을 꽂아 줬다. 뭐지? 이 두근거림은? 수정은 심쿵한 에게 다가와 팔을 들어 어깨동무를 하며 말없이 웃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태어나 처음 맡아본 겨드랑이 암내가  후두부를 강타했다. 콧 속이 온통 수정이의 암내로 지배당했다. 수정이는 사랑했지만 암내까지는 아니었다.  수정이가 기분 나쁘지 않게 그녀가 감싼 로부터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고 보니 늘 긴팔을 입다 날이 더워져 반팔을 입은 첫날이었고, 새 학년 새 학기에 처음 만난 수정이와 같이 보내는 첫여름이었다. 아뿔싸, 앞으로 적어도 3개월 동안 이 냄새를 맡아야 하다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다고 수정을 피하지 않았다. 수정은 지독한 암내를 인내하고 감내할 만큼 매력적이고 좋은 친구였다. 수정이가 웃으면 온 세상이 핑크빛이 되었다. 단, 팔을 들기 전까지만. 어서 가을이 와, 날이 서늘해지길 기다렸다. 긴팔을 입게 되면 수정이를 더 사랑하게 될 테니.

  드디어 바라던 가을이 왔으나 곁에 수정은 없었다. 수정이는 여름 방학이 끝나자 전학을 갔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수정의 전학 소식을 담임 선생님에게 들은  자꾸만 눈물이 났다. 가을이 되어 헤어질 줄 알았다면 지난여름 수정이의 암내에 얼굴을 찡그리지 말 걸. 그 냄새에 익숙해지려 노력해볼 걸. 마치 가을을 기다리던 나의 바람 때문에 수정이 떠난 듯, 자신을 자책했다.

  어른이 된 후엔 한 여름 대중교통을 타다 콧 끝을 스치는 타인의 암내에 늘 수정을 떠올렸다. 그냥 자동으로 수정이가 생각나다 못해 그녀와 웃으며 걷던 하굣길, 자주 사 먹던 뽑기의 맛까지 떠올랐다. 수정은 지금도 에게 여름의 냄새로 기억 속에 살고 있다.

  이번엔 남자다. 남자의 체취라 병히가 모르는  과거가 있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열여덟 소녀를 설레게 한 국어 선생님의 냄새다. 하얗고 멀끔한 사십 대 초반의 민석쌤은 말투가 부드럽고 자상했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시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속에서 꽃잎들이 떨어졌다. 한 번씩 민석쌤이 교과서를 들고 지문을 읽으며 교실을 돌 때 그에게서 풍기는 오이비누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의 콧 속으로 십 대의 풋내기 짝사랑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민석쌤은 이미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지만 짝사랑은 죄가 아니지 않나.

  사십 대 아재가 이토록 섹시할 수 있다니! 으른의 섹시함에 취한 나의 눈에 또래 남자들은 축구로 시커멓게 타서 고약한 땀내를 풍기는 애송이었다.

  민석쌤이 쓰는 오이비누는 무엇이길래 이리도 청량한 냄새를 종일 풍기는 것인지 궁금했다. 설마 타고난 살 냄새? 그 냄새를 매일, 평생 맡고 살 사모님이 부러울 정도였다.

  평소 수줍음이 많아 열렬히 사모하는 민석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을 설레게 하는 상대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한편으론 도망치고 싶다는 걸.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양가감정에 혼돈의 나날을 보냈다.

  국어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민석쌤의 오이비누 냄새에 취한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를 추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 분간의 토론 끝 내린 결론은 한결같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십 대 아재중 민석쌤이 가장 섹시하다고. 그가 쫄티를 입었겠는가? 식스팩이 있겠는가? 민석쌤은 절제된 깔끔한 섹시미가 있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지금까지 결혼 후 살면서 그런 섹시미를 가진 연예인은 봤어도 일반인은 민석쌤이 유일했다.

  오죽하면 연애시절 병히에게 민석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 오이비누 향기를 풍기는 향수를 수소문하여 선물했다. 물론 이런 내막은 말하지 않고 이 향수를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한 두 번 뿌리더니 병히는 향수를 쓰지 않았다.

  흔한 향수라 뿌리고 다니는 남자들이 많아 의도치 않게 종종 맡았는데 이상하게도 민석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좋은 냄새가 나네 정도에서 감정은 끝났다. 그 향기는 열여덟 짝사랑에 심취한 시절로 데려가진 못했다. 힘이 약했다고 해야 할까. 상호작용 없이 일방적으로 쏟아부은 감정은 허공에 뿌린 향수처럼 옅어졌다. 그래도 오이비누 냄새가 누군가에게 난다면 호감도가 십 프로는 상승했으니 나의 삶에 여전히 영향을 미쳤다.

   글을 읽으며 혹시 떠오르는 냄새가 있는지 묻고 싶다. 후각은 시각처럼 자극적이지도 미각처럼 충만하지도 않지만 지배해왔다. 나는 나의 주변인들에게 어떤 냄새로 기억될까? 킁킁, 나한테 무슨 냄새 안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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