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감 중 유독 후각이 예민했다. 그래서 호흡과 동시에 훅 하고 들어온 냄새는 장기 기억으로 향하는 프리패스권이었다. 그 티켓을 가지고 내 생애 속 냄새로 기억되는 이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초등학교 시절 만난 수정이는 성격이 호탕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달리기를 잘해 군살 없는 체형까지 내가 갖지 못한 걸 다 가진 친구였다. 외향적이고 주변은 또 어찌나 잘 챙기는지 열두 살이 아닌 서른두 살의 사회생활 바이브를 가진 아이였다. 그래서 모두가 수정을 사랑했고 나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풍족하게 용돈을 받았던 수정은 하교할 때 친구 서넛을 데리고 문구점으로 매일같이 향했다. 백 원, 이백 원짜리 불량식품을 하나씩 친구들 손에 쥐어주고 빳빳한 천 원짜리를 빨간 지갑에서 꺼내 계산하는 수정이는 빛이었다. 오!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날 유달리 좋아했던 수정이는 다른 아이들 몰래 내 주머니 속에 춥파춥스 레몬맛(최애 사탕)을 꽂아 줬다. 뭐지? 이 두근거림은? 수정은 심쿵한 나에게 다가와 팔을 들어 어깨동무를 하며 말없이 웃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태어나 처음 맡아본 겨드랑이 암내가 후두부를 강타했다. 콧 속이 온통 수정이의 암내로 지배당했다. 수정이는 사랑했지만 암내까지는 아니었다. 난 수정이가 기분 나쁘지 않게 그녀가 감싼 팔로부터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고 보니 늘 긴팔을 입다 날이 더워져 반팔을 입은 첫날이었고, 새 학년 새 학기에 처음 만난 수정이와 같이 보내는 첫여름이었다. 아뿔싸, 앞으로 적어도 3개월 동안 이 냄새를 맡아야 하다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다고 수정을 피하지 않았다. 수정은 지독한 암내를 인내하고 감내할 만큼 매력적이고 좋은 친구였다. 수정이가 웃으면 온 세상이 핑크빛이 되었다. 단, 팔을 들기 전까지만. 어서 가을이 와, 날이 서늘해지길 기다렸다. 긴팔을 입게 되면 수정이를 더 사랑하게 될 테니.
드디어 바라던 가을이 왔으나 내 곁에 수정은 없었다. 수정이는 여름 방학이 끝나자 전학을 갔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수정의 전학 소식을 담임 선생님에게 들은 난 자꾸만 눈물이 났다. 가을이 되어 헤어질 줄 알았다면 지난여름 수정이의 암내에 얼굴을 찡그리지 말 걸. 그 냄새에 익숙해지려 노력해볼 걸. 마치 가을을 기다리던 나의 바람 때문에 수정이 떠난 듯, 자신을 자책했다.
어른이 된 후엔 한 여름 대중교통을 타다 콧 끝을 스치는 타인의 암내에 늘 수정을 떠올렸다. 그냥 자동으로 수정이가 생각나다 못해 그녀와 웃으며 걷던 하굣길, 자주 사 먹던 뽑기의 맛까지 떠올랐다. 수정은 지금도 나에게 여름의 냄새로 기억 속에 살고 있다.
이번엔 남자다. 남자의 체취라 병히가 모르는 과거가 있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열여덟 소녀를 설레게 한 국어 선생님의 냄새다. 하얗고 멀끔한 사십 대 초반의 민석쌤은 말투가 부드럽고 자상했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시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속에서 꽃잎들이 떨어졌다. 한 번씩 민석쌤이 교과서를 들고 지문을 읽으며 교실을 돌 때 그에게서 풍기는 오이비누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의 콧 속으로 십 대의 풋내기 짝사랑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민석쌤은 이미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지만 짝사랑은 죄가 아니지 않나.
사십 대 아재가 이토록 섹시할 수 있다니! 으른의 섹시함에 취한 나의 눈에 또래 남자들은 축구로 시커멓게 타서 고약한 땀내를 풍기는 애송이었다.
민석쌤이 쓰는 오이비누는 무엇이길래 이리도 청량한 냄새를 종일 풍기는 것인지 궁금했다. 설마 타고난 살 냄새? 그 냄새를 매일, 평생 맡고 살 사모님이 부러울 정도였다.
평소 수줍음이 많아 열렬히 사모하는 민석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을 설레게 하는 상대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한편으론 도망치고 싶다는 걸.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양가감정에 혼돈의 나날을 보냈다.
국어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민석쌤의 오이비누 냄새에 취한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를 추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 분간의 토론 끝 내린 결론은 한결같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십 대 아재중 민석쌤이 가장 섹시하다고. 그가 쫄티를 입었겠는가? 식스팩이 있겠는가? 민석쌤은 절제된 깔끔한 섹시미가 있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지금까지 결혼 후 살면서 그런 섹시미를 가진 연예인은 봤어도 일반인은 민석쌤이 유일했다.
오죽하면 연애시절 병히에게 민석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 오이비누 향기를 풍기는 향수를 수소문하여 선물했다. 물론 이런 내막은 말하지 않고 이 향수를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한 두 번 뿌리더니 병히는 향수를 쓰지 않았다.
흔한 향수라 뿌리고 다니는 남자들이 많아 의도치 않게 종종 맡았는데 이상하게도 민석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좋은 냄새가 나네 정도에서 감정은 끝났다. 그 향기는 열여덟 짝사랑에 심취한 시절로 데려가진 못했다. 힘이 약했다고 해야 할까. 상호작용 없이 일방적으로 쏟아부은 감정은 허공에 뿌린 향수처럼 옅어졌다. 그래도 오이비누 냄새가 누군가에게 난다면 호감도가 십 프로는 상승했으니 나의 삶에 여전히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을 읽으며 혹시 떠오르는 냄새가 있는지 묻고 싶다. 후각은 시각처럼 자극적이지도 미각처럼 충만하지도 않지만 날 지배해왔다. 나는 나의 주변인들에게 어떤 냄새로 기억될까? 킁킁, 나한테 무슨 냄새 안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