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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속 Aug 17. 2022

알싸한 손절의 맛

수진아 수진아

  수진이는 내가 가장 좋아한 친구였다. 시제가 과거인 건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그녀와의 첫 만남은 꽤나 임팩트 있었다. 13살의 이른 여름날, 5월의 도른 자가 되어 적응을 완료한 나는 교실에서 창밖을 보던 수진이의 등짝을 발견했다. 오동통한 체형의 수진이는 브라 끈이 살 때문인지 도드라져 보였고 난 망설임 없이 다가가 수진이의 브라 끈을 옷 위로 쫙 잡아 늘린 다음 사정없이 놔버렸다. 끈이 등짝을 갈기며 앙칼진 탁! 소릴 냈고 수진이는 놀라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날 돌아봤다. 난 그녀에게 익살스럽게 씩 웃어 보였는데 수진이는 날보고 미친놈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동글동글한 인상에 늘 웃고만 있어서 내 장난을 받아줄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경악하며 혐오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아차차 내가 선을 넘었구나. 안절부절못하며 정말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하자 수진이는 복수라며 내 브라 끈을 쫙 늘려 잡은 뒤 놨고 난 등짝이 따끔해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런 내 모습에 우린 동시에 웃음이 터졌고 그렇게 친구가 됐다.

  수진이는 미술학원을 오랫동안 다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난 수진이가 그린 풍경화가 좋았다. 특히 바다 그림은 에매랄드 빛의 오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초등생의 실력치 제법 능숙하게 표현했다. 그 바다를 보며 수진이에게 이런 바다를 실제로 본 적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녀는 꿈결에서 본 풍경이라고 대답했다. 어딘가에 그림 속 바다가 있을지 모르니 자라서 어른이 되면 같이 가보자 했더니 수진이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같은 중학교에 갔지만 얄궂게도 수진이와 나는 같은 반 한 되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제일 친한 친구로 서로 교환일기를 쓸 만큼 각별했다. 수진이는 내 생일이 되면 용돈을 모아 내가 흘리듯 말했던 물건을 기억해 선물로 줬다. 한 번은 꽃을 받아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장미꽃 한 송이를 이유도 없이 책상 위에 놓아두기도 하고 귀여운 아기 양말 속에 초콜릿을 가득 담아 주기도 했다.

  같은 지역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어도 우린 제일 친한 친구였다. 다른 대학에 갔어도 졸업 후 서로 다른 학원의 강사가 되었어도 수진이는 언제든 연락하면 나를 만나러 하붕이(하늘색 스파크)를 타고 우리 집 앞으로 와주었다.

  우린 비밀이 없는 사이였다. 그래서 난 수진이의 썸남 역사를 모조리 알고 있었다. 그중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수진이의 썸남은 그녀와 같은 학원에서 일하던 수학강사였다. 그는 수진이에게 살찐 사람을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에 동조할 수 없으며 살이 찐 여자도 충분히 예쁘고 매력적이라며 마치 수진이를 겨냥하는 멘트로 그녀를 설레게 했다. 늦은 퇴근을 했을 땐 수진이와 단둘이 저녁을 먹자고 하고 매일 새벽 늦게 까지 전화통화를 했으며 한 날은 같이 바다를 보러 가자며 새벽 네시에 하붕이를 타고 서해바다까지 보고 왔다. 수진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썸남과의 일들을 소상히 말해줬고 난 수진이에게 이건 그 남자가 대놓고 너에게 고백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사귀라고 둘 사이를 응원을 해줬다.

  나나 수진이나 모솔로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해봤기에 수진이의 연애는 마치 내 일처럼 내 마음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한동안 그녀의 연락이 뜸하길래 연애사업으로 바쁜가 보다 했는데 그 썸남이 세상에 임신을 시켰다고. 아, 수진이가 아니라 학원의 다른 여자 국어 강사를 말이다. 혼전임신으로 그들은 결혼을 했고 수진이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난 화가 났다. 수진이를 붙잡고 그 결혼식에 가서 깽판을 놓자고 내가 게거품을 잘 무니 믿어보라 했는데 수진이는 그와 사귄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좋아한 거니 참아달라고 했다. 그날 우린 마주 앉아 한동안 서로 말을 잇지 못했다. 개자식, 사람을 가지고 놀다니 살찐 여자도 매력적이라더니 빼짝 마른 여자하고 애나 만들고!

  늘 썸에서 부도가 나버리는 수진이의 연애사업 실패의 원인이 뭘까. 난 조심스럽게 수진이에게 살을 빼보길 권했다. 그러자 이미 다이어트 중이라는 수진이는 다이어트 전과 똑같았다. 그래도 동기부여가 될까 만날 때마다 살이 빠졌다고 빈말을 했는데 그럼 수진이는  닭가슴살 샐러드의 효과라며 웃어보였다.

  이십대 후반, 내가  병히와 사귀며 자연스럽게 수진이와의 연락이 줄었다. 솔직히 말하면 언젠가부터 내 전화를 수진이가 받지 않았다. 부재중이 뜰 텐데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문자에도 톡에도 답이 없었다. 카카오 스토리 친구를 끊더니 카톡도 차단한 듯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하루아침에 베프에게 버림받다니 인정할 수 없어서 구구절절 이메일도 보내보고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도 보냈지만 답은 역시나 없었다.

  청소년기를 포함한 인생의 절반을 넘게 함께한 친구에게 당한 절교는 내 마음을 오래도록 힘들게 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어떤 실수로 수진이의 마음을 상하게 했나. 사과하고 관계를 되돌리고 싶었는데 수진이는 기회를 주지 않고 떠나갔다. 훗날 내 결혼식에서 스냅사진을 찍어주겠다던 그녀는 결혼식은커녕 내 삶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다.

  결혼 후 사이판 해변을 병히와 걷는데 바다 색이 익숙했다. 머릿속으로 널브러진 해변 위의 쓰레기들을 지우고 왁자지껄한 관광객들을 하나 둘 지우고 바다와 하늘만 남겨두니 지난 날 보았던 수진이의 풍경화 같았다. 그러자 어른이 되어 바다를 보러 오자는 내 말에 답을 안 한 수진이의 앙다문 입술의 주름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절교한 지 8년이나 된 수진이와 조우하는 꿈을 종종 다. 너무도 반가워 그녀에게 연락처를 물으면 수진이는 웃기만 할 뿐 번호를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언젠가 꿈결 속 수진이가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날이 온다면 그 번호로 로또나 하나 사야겠다고. 내가 만약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그건  친구였던 수진이, 그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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