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진학 후 적성에 안 맞는 학과 공부는 내 마음을 붕 뜨게 만들었다. 천성이 일탈과 멀어 수업 한번 안 빼먹고 강의를 듣다 보니 성적이 좋은 편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조교에게 교직이수를 할 의향이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교직이수를 위해 돈 들여 대학원도 가는 마당에 교원자격증을 따두면 미래에 유용하겠다 싶어 하겠다 말하곤 새로운 돌파구를 맞이해 신이 났다.
1학년 학부를 마무리하며 관광경영과 관광통역 중 하나로 전공을 결정해야 했던 난 관광통역을 선택했다. 일단은 영어를 못해 잘하고 싶었고 영어 전자사전을 30만 원이나 주고 샀는데 거의 쓰지를 않아 요긴하게 써볼 겸 큰 고민 없이 선택했다.
앞으로 금요일마다 교직이수 강의가 있어 미리 시간표를 짜야해 조교에게 전화를 거니 목소리가 무거웠다.
"지속이 너 관광통역으로 한다며? 2등부터 5등까지 통역과를 고르고 걔들이 모두 교직이수를 한대서 넌 밀려났어. 경영으로 갔으면 됐을 텐데..."
8명까지 교직이수가 가능했고 경영에 네 자리, 통역의 네 자리였기에 내가 밀려난 것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졸지에 나보다 성적은 낮았지만 경영을 골라 교직이수를 받은 친구들은 현재 두 명이나 임용시험 후 정식 교사가 되었다. 인생이 꽈배기도 아니고 그때부터 내 삶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대학을 관두고 싶었다.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를 갔어야 했다고. 아니면 적어도 경영을 골랐어야 했다고. 내가 운영할 호텔이나 여행사가 있는 게 아니기에 경영보다 영어가 더 쓸모 있을 줄 알았는데 영어를 못하면서 전공으로 고른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 와중에 원어민 교수는 나의 지능이 정상이 아닐 거라 의심까지 했다. 왜냐하면 수업은 꼬박꼬박 우거지 죽상을 하고 들으면서 단어 시험은 빵점에 성적은 하위권이었기에. 그는 늘 내게 언해피 해 보인다며 웃으라고 했지만 한 번을 웃지 않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불만에 가득 차 졸업을 했다.
졸업 후엔 이제라도 바른 선택을 하고 싶어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원서를 썼다. 얼마 뒤 대학 조교에게 전화가 왔는데 서울 모 관광호텔의 호텔리어로 취직할 생각이 없냐는 전화였다. 키 165cm가 넘고 호감형의 학생을 추천해달래서 내 생각이 났다는데 난 1초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조교는 무조건 붙는 면접의 거절 이유를 물었다. 일단 난 키가 그에 미치지 못하며 소설가라는 대의가 있기에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내가 정말 멋졌다. 크, 꿈을 위해 취업자리를 발로 걷어찬 멋진 나란 여자에게 취했다.
그 후 나는 대학원에 단박에 붙어 화려한 등단을 하고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라고 쓰고 싶지만 대학원에 똑떨어졌다. 급히 용돈벌이라도 해야 했기에 벼룩시장을 뒤지며 일할만한 동네 영어학원을 찾아 나섰다. 학원을 전전하며 또다시 후회를 했다. 고향 시골 구석에서 이러고 있느니 서울에 가서 호텔리어가 되어볼걸. 다시 조교에게 연락해볼까 했지만 이미 버스는 나를 지나간 지 오래였다.
후회라고 쓰지만 어리석은 선택의 연속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온 우주가 나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데 내가 어떻게 버티고 서 있을까. 꼿꼿하게 허리를 필수록 나를 더욱 짓밟는데 어떻게 감당할까. 그래서 그저 밟힌 채 있기로 했다. 더 나아지기 위해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았다. 대충 살기로 대강 하기로 유야무야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외모는 싱그러운 20대의 아가씨였지만 표정은 세상을 다 산 사람 같았다. 울상이었다. 늘 울고 싶었으니 당연히 울상이 되었겠지. 노처녀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며 월급을 용돈으로 쓰며 5년씩이나 삶을 허비했다.
그러다 미친 척 한 문예지에 소설을 응모했다. 신인상을 준다는 연락을 받고 얼떨떨했다. 관계자는 대신 문예지 100권을 구매해야 한다고, 책 가격은 권당 만원이었다. 게다가 가입비도 있다고 했다. 뭐지? 원래 문예지로 등단하면 이런 걸까?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해보곤 고심 끝에 제의를 거절했다. 신인상이라니 남들 보기엔 참 근사했지만 스스로는 속일 수 없었다. 한데 관계자가 이미 문예지에 소설이 수록됐다고 무대포로 나왔다. 신인상을 안 받으니 책은 안 사도 됐지만 문예지에 내 소설이 수록되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졌다.
교보문고에서만 해당 문예지를 구매할 수 있었다. 궁금했다. 내 소설이 문예지에 실리다니, 주말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물어물어 터미널에서 가까운 교보문고를 찾았고 역시나 물어물어 구석에 처박히다시피 있던 문예지를 발견했다. 두 권을 샀다. 기분이 이상했는데 왜 슬픔에 더 가까운 감정이 들었나 모르겠다. 오는 길에 펼쳐 읽어보니 엉성하고 근본 없는 문장으로 이뤄진 조잡한 소설이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번 선택은 후회하지 않았다. 문예지 백 권과 신인상을 바꾸지 않길 잘했다고. 마지막 티끌 같은 자존심을 지킨걸 스스로 칭찬했다.
먼지 쌓여 누구의 눈길도 손길도 받지 못한 채 빛바랜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수록한 한 권의 책은 지금도 책장 한 구석에 꽂혀있다. 그곳에 봉인된 나의 흑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만 아시길. 평생 비밀로 하고픈 잠자리 이불 킥을 부르는 내 과거, 병히는 상상도 못 할 마누라의 19금 야설 한 편이 그곳에 곤히 잠들어있기에. (제발 깨어나지 말고 계속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