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다 아빠의 사업이 부도나고 동업자 아저씨가 쇠고랑을 차는 바람에 아빠의 고향으로 네 식구가 도망치듯 내려왔다. 나름 서울 물을 먹었다고 촌년이 될 생각에 암담했다.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서울에서도 잦은 전학으로 친구가 없었기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걸을 때마다 삐그덕 소리를 내는 나무마루 위 줄 맞춰 놓인 책상들을 한번 훑고는 빈자리에 앉았다. 전학 가는 친구는 많아도 전학 오는 이는 드문 작은 시골의 분교였다. 그래서였나. 내 주변으로 아이들이 몰려왔다.
"너 눈이 예쁘다. 되게 하얗다."
정신이 혼미 해질 정도로 칭찬을 들었다. 서울에서 전학을 다닐 땐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먼저 말을 거는 친구도 드물었다. 이곳은 대체 어느 곳이기에 내게 이토록 기분 좋은 소리와 관심을 줄까? 천국 같았다. 반 친구들은 쉬는 시간이 되면 내게 몰려왔다. 호기심과 애정이 묻어있는 눈빛으로 공기놀이를 하자고 내 손을 끌었고 손편지와 손수 그린 그림도 자주 줬다. 모두가 날 좋아했고 나도 모두가 좋았다.
새로 이사 온 집은 연립의 3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없었고 내방 창문을 열면 2층 단독주택의 옥상이 보였다. 그땐 그게 누구의 집인지 몰랐다. 초저녁 익숙한 목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오기 전까진. 고래고래 시끄럽게 아이가 내지르는 소리에 창문을 열고는 눈앞에 광경에 깜짝 놀랐다. 병찬이가 옥상 빨랫줄에 널린 이불을 장난감 칼로 마구 베면서 정의의 용사가 되었기에!
병찬이의 낯선 모습에 놀라 혹시나 날 볼까 봐, 고개를 푹 숙이며 숨었다. 병찬이는 우리 반 반장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에 외까풀의 눈, 운동을 좋아하고 선생님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친구였다. 청각장애가 있어 말이 어눌하던 경수의 말을 유일하게 알아들어 병찬이는 늘 경수랑 짝꿍이었다. 전학 온 지 3개월이 되니 병찬이의 선하고 바른 모습을 자주 목격했는데 옥상 위의 병찬이는 딱 열 살 아이의 모습이었다. 원맨쇼 하는 병찬이를 한참 훔쳐봤다. 그렇게 그 모습을 보며 소리 죽여 낄낄거리다 심장이 덜컹 땅으로 떨어졌다가 올라붙었다. 병찬이가 좋아진 것이다.
다음 날부터 병찬이를 보기만 했는데도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르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고작 열 살이었기에 그 감정이 뭔지 몰랐다. 그러다 체육 시간에 피구왕 통키 붐으로 피구를 했는데 병찬이랑 같은 편이 되었다. 기분 탓인가. 내게 오는 피구공을 병찬이가 열심히 막아주는 느낌? 몸이 둔해서 진작 공을 맞고 죽었어야 했는데 병찬이랑 단둘이 살아남았다. 설마 아니겠지. 날 향해 날아오는 공을 또다시 막으려다 병찬이가 공에 맞고 말았다. 웃으며 선 밖으로 나가는 병찬이의 모습에 슬로 모션이 걸리더니 별빛이, 꽃가루 금가루가 눈앞으로 떨어졌다. 그 알 수 없던 감정은 사랑이었다.
내 방 창문은 늘 활짝 열려있었다. 언제 병찬이가 옥상에서 놀지 몰랐기 때문에. 병찬이네는 정육점을 했는데 옥상에서 종종 삼겹살도 구워 먹었다.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내 방까지 풍겨 왔는데 그럴 때면 나도 옥상에서 병찬이랑 삼겹살 쌈을 크게 한입 싸 먹는 상상을 했다.
학교에서 병찬이랑은 딱 같은 반 친구사이의 우정을 나눴다. 내가 마음을 철저하게 감췄다. 한 번은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며 친구들과 놀았는데 내 종이비행기를 병찬이가 보더니 이럼 멀리 못 나간다며 다시 접어줬다. 종이를 펼쳐 손톱을 세워 꼼꼼하게 비행기를 접던 병찬이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1년 뒤 난 읍소재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병찬이를 못 본다는 게 슬퍼서 눈물이 났다. 내가 널 다시 만나러 올게. 혼자 다짐하며 교실을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고등학교가 없는 면단위 마을, 고등학생이 되면 병찬이를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다. 공부를 잘했던 병찬이는 읍소재의 사립고에 올 거라고. 중학교 시절 그 생각 하나로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대망의 사립고 입학식, 어디에도 병찬이는 없었다. 나중에 물어물어 알아보니 그는 공립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병찬이와 그렇게 어긋나 버렸다. 수진이가 병찬이와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기에 그녀에게서 병찬이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얼마 후 같은 반 여학생과 병찬이가 사귄다는 소식을 듣곤 그를 향한 마음을 손톱을 세워 종이를 접듯 말끔히 접었다.
어른이 된 병찬이는 파일럿이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십 년 넘게 사귄 첫사랑 여자 친구랑 결혼할 예정이라고, 여기까지가 내가 전해 들은 그의 마지막 소식이다. 비로소 나는 훔쳐보기에 이은 몰래 소식 듣기도 끝마쳤다.
멋짐에서 시작해 멋짐으로 끝맺음된 그로 하여금 단 한 가지 사실이 증명되었다. 난 천부적으로 남자 보는 눈이 탁월하다.(윙크 찡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