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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속 Sep 07. 2022

나의 명절 이야기

지금은 오는 게 두렵다

  어릴 땐 명절을 기다렸다. 맛난 음식 한 상에 과자와 식혜를 실컷 먹고 어른들께 두둑이 용돈까지 받으니 일 년에 명절이 두 번뿐인 게 아쉬웠다. 게다가 연휴로 학교까지 빠지니 세미 방학이랄까? 그냥 자지러지게 신나는 날이었다.

  성인이 된 후로도 명절을 기다렸다. 노처녀 원장이 명절 선물이라고 천안호두과자 한 상자를 쥐어줬지만 연휴가 있기에 괜찮았다. 아빠, 엄마, 종부는 명절 당일 큰집으로 차례를 지내러 가고 난 집에서 혼자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케이블 영화를 봤다. 씻지도 않았다. 나갈 일도 만날 이도 없기에, 자연인이 되어 사회생활로 지친 몸을 충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결혼 후 첫 명절은 쇼킹했다. 큰집에서 차례를 지내기에 명절 당일 병히 손을 잡고 큰집에 수줍게 입장했다. 새 아가에게 제대로 인사를 받고 싶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에게 한복을 입고 절을 했다. 용돈을 주시기에 넙쭉받고 결혼 후 명절도 꿀이네라고 생각할 때 머릿속으로 번쩍 꿀밤이 날아왔다. 남자들만 상에서 밥을 먼저 먹었다. 큰어머니며 시어머니며 작은어머니까지 열심히 남자 어른들과 본인들 자녀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고 있는데 병히는 이미 상에 앉아 동그랑땡을 집어 먹으며 사촌 형과 낄낄대고 있었다. 누구 하나 나더러 밥을 먹으라 하는 이가 없었다. 맛있는 냄새에 배는 고픈데 남자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나둘 자리를 뜨고 다 헤집어놓은 밥상을 보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비위가 상했다. 상황을 보니 여자들은 밥과 국만 새로 떠와서 남자들이 먹던 상에 그대로 앉아 식사를 했다. 접시 위의 뒤집어진 문어숙회를 한 번 쳐다보고 내 국을 떠먹었다. 지저분하게 살이 발린 굴비를 한 번 쳐다보고 내 밥을 떠먹었다. 그나마 동그랑땡은 제법 깨끗이 먹었길래 한두 개 집어먹었다. 서러웠다. 타인이 먹다 남긴 반찬으로 식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자 산더미 같은 그릇들이 개수대에 쌓였다. 큰댁 형님과 둘이 설거지를 했다. 병히는 거실에서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장 고무장갑을 내던지고 병히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꾹 참았다. 설거지 후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작은댁 차례를 가야 한다고.... 그날 오후 다섯 시가 되어 신혼집에 도착했다. 난 눈물을 펑펑 쏟으며 서럽다고 울었는데 병히는 다들 그렇게 산다고 대우받을 생각만 말라고 일 년에 두 번인데 좀 참으라고 했다. 위로를 기대했는데 병히의 날 선 반응에 실망했고 난 지난 32년 동안 좋아했던 명절을 혐오하게 됐다. 우리 집은 남자 여자 동시에 밥을 먹는다고 너네 집처럼 며느리가 먹다 남긴 음식물 처리반이 아니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병히는 말이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오 년 전과 달라졌을까? 그럴 리가. 큰집에 식기세척기를 들여 설거지 지옥에선 벗어났지만 여전히 여자들은 남자들이 먹다 남은 반찬으로 식사를 했다. 코로나로 지난 2년은 명절에 가지 않았는데 올해는 내가 먼저 가겠다고 말했다. 두 돌 된 진이를 친척 어른들이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추석날은 우리 진이가 데뷔?! 하는 날이다. 여전히 수십 개의 젓가락이 헤집고 간 반찬으로 밥은 못 먹겠지만, 조미김 한 봉지를 애들 핑계로 챙겨가 내 반찬으로 먹어야겠다.

  

  저의 추석은 앞서 보신대로 굴러갈 예정이지만 여러분들의 추석은 풍성하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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