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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속 Sep 20. 2022

이름만 에르메스

분노조절자의 서막을 열다

  나의 첫 사회생활은 에르메스 어학원의 관리자였다. 원격 화상수업으로 교육이 이루어져 강의실 없이 줄줄이 컴퓨터가 놓인 학원 내부 한쪽 구석엔 내가 앉는 작은 책상이 덩그러니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신규 상담과 학원 청소, 컴퓨터 프로그램을 켜고 끄는 정도의 쉽고 잡스러운 일이었다.

  막 개원한 학원이라 학생이 없어 텅 빈 학원에서 인터넷 쇼핑을 하거나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정말이지 지루해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타지에서 메인 학원을 운영하고 있던 원장은 불시에 학원을 덮치기까지 다. 연락 없이 와서는 학원 내부를 둘러보다 켜져 있는 에어컨을 탁 끄더니,

"학생이 없을 땐 에어컨 틀지 마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더웠는데 기분이 상했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가만 보자. 원생이 없는데 그럼 이 위에 어쩌라는 거지? 나는 사람이 아닌가? 그를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원장이 가자마자 인터넷 쇼핑으로 탁상용 미니 선풍기를 구매해 작은 책상 위에 두었다. 신규 학생이 절실했다. 학생이 없으면 에어컨을 쓸 수 없지 않은가. 상담 멘트를 적고 달달 외우며 학부모를 홀릴 작전을 세웠다. 연습 3일 뒤 드디어 신규 원생이 들어왔다. 그렇게 하나 둘 학생이 늘어 스무 명 남짓이 되었다.

  원장은 내게 어리지만 상담을 잘한다며 칭찬을 했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월급을 일주일씩 늦게 주는 그가 얄미웠다. 한 날은 학생이 없는 이른 오후에 와서는 칠판을 설치해줬는데 원장이 땀을 뻘뻘 흘렸다. 그가 에어컨 리모컨을 잡으려 손을 뻗자, 잽싸게 리모컨을 낚아채 서랍 안에 넣으며 그에게 말했다.

"학생이 없을 땐 에어컨 사용 금지입니다."

원장은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앞서 내뱉은 말이 있기에 침묵하며 흐르는 땀을 소매 끝으로 닦아냈다. 난 그런 원장을 보며 테이블 미니 선풍기에 얼굴을 빠짝 대곤 오늘은 더운 날도 아니라고 말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복수는 짜릿하고 신나는 법. 원장은 더위에 지쳤는지 칠판을 마저 설치하지 못한 채 내빼고 말았다. 쪼잔한 놈. 인지상정이라고 무더위에 에어컨을 못쓰게 하는 게 말이 되냐고.

  쩨쩨한 원장은 돈독이 올랐는지 에르메스 어학원을 서로 다른 지역에 동시에 세 곳이나 개원했다. 메인 학원에서 관리자 전체 회의가 있어 다른 지점 관리자들과 만났는데 한 명은 사회생활 만랩의 여우였고 나머지 한 명은 내 또래의 순진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우리는 서로 연락처와 네이트온 아이디를 주고받은 후 거의 매일 서로 연락을 하며 지냈다.

  원장은 한양대를 졸업한 여우과 관리자를 몹시 좋아했다. 똑똑하고 야무지다며 이래서 인 서울 4년제 졸업생은 다르다고 굳이 지방대를 나온 내 앞에서 신나게 떠들곤 했다. 그 여우가 원장 욕을 매일 주도적으로 했는데 뒤에서 호박씨를 까면서 앞에선 예쁨을 받는 그 관리자와 원장 모두가 꼴 보기 싫었다. 월급날은 여우가 원장을 신나게 씹는 날이었는데 마침 원장이 우리 지점에 왔다. 난 그녀에게 네이트온 메시지가 올 것을 예측해 내가 쓰는 관리용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원장과 대화를 나눴다. 바로 그때 이런 메시지를 담은 창이 경쾌한 알람 소리와 떴다.

"지속쌤 월급 받았어? 받았을 리가 없지. 원장 새끼는 꼭 월급날엔 안보이더라. 돈 주기 싫어서 그래 그 새끼ㅋㅋㅋ"

난 노안의 원장이 메시지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속으로 3초를 센 뒤 에구머니나 하며 급히 창을 닫았다. 원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바뀌더니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난 큰일이 벌어질까 조마조마했는데 원장은 여우에게 전화를 걸더니 오늘 월급날인데 곧 돈을 보내겠다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 후 원장은 더 이상 여우를 칭찬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다 싶어 그 당시 지역 신문사 기자였던 수진이에게 학원 홍보 기사를 부탁한 사실을 원장에게 전했다. 그는 기뻐하며 지역 토박이 관리자는 역시 인맥이 다르다며 크게 칭찬하더니 당장 인터뷰 날짜를 잡자고 했다.

  약속한 날이 되자, 수진이와 원장이 모두 학원에 모였고 화기애애하게 원장과 기사에 실을 사진을 찍었다.  며칠 뒤 홍보기사를 실은 신문을 수진이가 들고 학원을 찾았다. 난 수진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는데 그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의례적으로 홍보기사를 써주면 신문을 구독해야 하는데 원장이 연락을 피해 입장이 애매해졌다고. 난 수진이의 말에 당황했다. 한 달에 만원인 신문 구독료가 아까워 연락을 피하다니. 게다가 내 친구가 기자인걸 다 알면서 내 체면은 생각 안 하나! 난 수진이에게 나라도 신문을 구독하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극구 사양했다.

  그 순간 이름만 에르메스, 실상은 쪼잔 졸렬 학원에 오만정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6개월 만에 관두고 오징어 지킴이가 굳건히 남편 사수하는 (한 달만에 관둔) 킹 영어전문학원으로 옮기게 다.

   지금은 망해서 사라진 에르메스 어학원을 검색하면 수진이가 쓴 지역신문의 기사가 뜬다. 사진 속 나는 원장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24살의 지속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웃기만 하라고 앞으로 펼쳐질 가시밭 길은 오롯이 이 언니의 몫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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