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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속 Sep 15. 2022

친절한 이웃, 그렇지 못한 남편

내가 늘 당하고 산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친절은 아홉 살 무렵 하굣길에서 일어난다. 혼자 무거운 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새로 전학 와서 친구가 없는 외톨이였기에 같이 간식을 먹으며 깔깔거리는 다른 아이들을 멈춰 선채 부러움에 한참 바라봤다. 그렇게 혼자 멍을 때리고 있는데 길 건너 방방이 아저씨가 내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니 활짝 웃으며,

"방방이 타고 싶어서 그렇게 봤니? 십 분만 타고 가. 돈 안내도 돼."

난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는데 아저씨는 내가 신고 있던 운동화까지 손수 벗겨주며 방방이 안으로 날 밀어 넣었다. 엉겁결에 방방이를 타게 돼서 소심하게 콩콩 뛰다 처음 보는 친구들과 신나게 점프를 하며 공짜 방방이를 타고 내려왔다. 집에 잘 가라고 인사까지 해주는 아저씨를 뒤로 하고 여전히 왜 날 태워줬지? 의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공교롭게 방방이 길 건너에서 멍을 때려 아저씨의 오해를 샀다고.

  얼마 뒤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집으로 향하는 길에 슈퍼 가게 그늘이 보여 쉴 겸 멈춰 섰다. 그렇게 또 멍을 때리는데 슈퍼 아줌마가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가 땀에 젖은 채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서있자 쭈쭈바를 까서 손에 쥐어줬다. 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 돈 없는데요 하자, 아줌마는 웃으면 오늘만 공짜야 더우니까 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셨다. 난 딸기맛 쭈쭈바를 먹으며 아홉 살 인생 처음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뭐지 이번엔 공짜 쭈쭈바네. 그때 처음으로 내가 타인의 시선에 애처롭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도 없이 무표정의 아이가 혼자 터덜터덜 걷다 멈춰 서 가만히 있다면 나 같아도 시선이 갈 것 같다고. 그렇게 겪은 이웃의 친절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결혼 후 병히와 백화점에 가면 어린 시절의 좋았던 기억을 되새기며 5층 명품관에서 멍을 때렸다. 첫 시작은 샤넬 매장이었다. 난 쇼윈도에 진열된 가방을 보며  다분히 의도적으로 멍을 때렸다. 그냥 계속 봤다. 병히가 내가 듣고픈 이야기를 먼저 해줄 때까지. 병히는 바쁜데 뭘 하는 거냐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실패했다. 그래. 샤넬은 너무 비싸지. 내가 욕심이 과했네. 그다음에 백화점에 갔을 땐 구찌 매장이었다. 또 그 앞에서 멍을 때렸다. 병히는 이제 너랑은 백화점에 안 오겠다고 엄포를 부렸다. 그래서 순순히 포기했다. 명품은 멍 때리기로 가질 수 없었다. 아쉬워라.

  백화점에서 생필품과 아이들 물건만 사들고 집으로 왔다. 급 허기가 졌다. 식탁에 앉아 멍을 때리는데 병히가 그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너 짬뽕 먹고 싶지? 사줄까?"

백화점에서는 절대로 사줄까 소리 안 하더니 좀 괘씸했지만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병히는 내가 좋아하는 찹쌀 탕수육까지 시켜줘 맛나게 식사를 마치고 생각했다.

  더 애처로운 눈빛을 연습해, 병히랑 또 백화점에 가면 막스마라 매장 앞에서 입을 벌리고 멍을 때리겠다고. 캐시미어 코트가 그렇게 따뜻하다면서요? 올 겨울은 캐시미어 코트에 이 한 몸 비벼봤으면! 친절하지 못 한 남편과 오늘도 지지고 볶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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