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자의로 인연을 끊은 첫 번째 친구는 유리였다. 그녀는 중고등학교 동창으로 똑 부러지고 공부도 잘해 늘 반장을 도맡아 했다. 교차점이 없어 보이는데 친해진 계기가 있었으니 우린 야설을 좋아했다. 사춘기 소녀들의 성에 대한 환상은 무지막지했으니 주부잡지의 수록된 "짜릿한 첫 경험의 추억"속 날것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함께 낄낄거렸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부끄러움도 없었다. 인터넷 속 야한 이야기를 읽고 함께 공유하며 친밀함을 쌓아갔다. 목소리가 크고 자기주장이 강한 유리와 조용하고 맞춰주는 성격의 나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우정을 지속했다.
그 관계의 균열은 대학 진학 후 생기는데 아시다시피 난 지방대에 유리는 자신의 욕심보다 못한 인 서울 여대에 입학한다. 유리는 성에 차지 않는 대입 후 반수를 해 내가 다니는 대학 지역의 교대로 다시 입학했다. 그래서 자주 봤는데 중요한 건 나의 자아가 성장해 유리의 말에 수긍하지 못해 그녀의 발언이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지방 4년제보다 인 서울 전문대가 더 비전 있다. 개나 소나 다 가는 대학원은 돈지랄이다. 난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이 보장되어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다 등등. 굳이 지방대를 다니는 내 앞에서 대학원을 갈 거라는 내 앞에서 미래를 걱정하는 내 앞에서 그녀가 내뱉은 말들이다. 나에 대한 배려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고 자기 잘난 맛에 취해하는 말들이 역겨워 참았어야 했지만 받아쳤다.
"그래 택시 운전하시는 아버지를 봐서라도 네가 교사가 되니 얼마나 다행이냐. 참 어머니는 마트 알바 아직도 하셔?"
유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난 유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잘난 그녀는 잘나지 못한 자신의 부모를 늘 아쉬워했기에. 약점을 공격한 건, 그것도 부모를 언급한 건 솔직히 내가 치사했다. 하지만 내 열등감을 먼저 긁어댄 건 유리였다. 우린 서로에게 치명적인 내상을 입히고 그렇게 연락을 끊었다. 내 자취방에서 새로 산 노트북으로 둘이 셀카를 찍고 떡볶이를 포장해 먹은 다음날인 스물세 살의 어느 날이었다.
절교하기 전, 유리는 종종 연락도 없이 우리 집 앞 편의점이라며 날 불렀다. 그녀는 심심해 들렸다며 빨대 꽂은 단지 바나나우유를 내게 건넸다. 달콤한 우유를 마시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다 들어왔다. 한 날은 동네 공원으로 불러 나가니 알바하는 엄마한테 감자 샌드위치를 만들어 갖다 주며 내 생각이 났다고 직접 만든 감자 샌드위치를 손에 쥐어줬다. 엄청 짰지만 하나를 다 먹고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그녀와 헤어졌다. 유리는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동네 친구가 있어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녀와 생각이 달랐다. 유리는 다른 친구들하곤 한껏 꾸미고 핫플레이스를 다니며 놀고 마시고 즐기면서 나랑은 늘 돈을 안 쓰는 만남을 해서 불쾌했달까.
게다가 그녀는 내가 하는 모든 것에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디지털카메라를 싸게 샀다고 자랑하니, 아닐걸? 제값 다 준 건 걸? 네가 순진해서 그 소릴 믿는구나 하며 재를 뿌렸다. 뉴질랜드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어 신이 나 자랑을 했더니 미국도 아니고 메리트가 전혀 없다며 초를 쳤다. 유리와 나는 결이 맞지 않았다.
유일하게 맞던 야설 코드도 그녀가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되자 틀어졌다. 그 남자랑 첫 키스를 하곤 들떠서 궁금하지도 않은 후기를 전하더니 그 후엔 뭘 했는지 뭐가 어땠는지 함구했다. 그래서 웃겼다. 순수할 땐 부끄러움도 없이 이런 체위를 해보고 싶네 어쩌네 떠벌이더니 막상 해보니 별거 없었나. 난 유리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교 후 그녀가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다만 내가 성공하면 안부를 가장한 자랑으로 열불 나게 해주고 싶단 생각을 했는데 이를 아직도 실현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건너 건너 그녀가 천안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같은 교사랑 결혼할 예정이란 소식을 10년 전에 들었다. 그 후 그녀 소식은 모른다. 뭐 계속 교사생활을 하고 있겠지. 여전히 잘나고 여전히 당당하고 여전히 이성적으로.
이달에 내 생일이 있어 병히에게 생애 첫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파티룸도 빌리고 샴페인과 핑거푸드도 준비하고 풍선으로 포토존도 꾸미고 레터링 케이크도 맞추고.... 병히가 한참 내 요구 사항을 듣더니 되물었다.
"파티엔 친구를 초대해야 하는데 너 친구 없잖아? 단둘이 무슨 서프라이즈야??"
"......."
여러분, 정말 친구가 없으면 생파를 못 하나요? 아....... 그래서 내가 아직 생일파티도 브라이덜 샤워도 베이비 샤워도 모조리 다 못해 본 건가? 처음으로 15년 전 절교한 유리의 존재가 아쉬웠다. 내 생일 파티에 축하의 폭죽을 팡팡 터트릴 손이 이토록 아쉬울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