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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속 Oct 26. 2022

시누가 생길 뻔?

너희 오빠를 봤어

  고등학교 동창 은지는 늘 유쾌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티가 났던 친구였는데 베스트 프렌드까지는 아니었어도 종종 대화를 나누며 좋은 인상을 주던 아이였다.

  고2가 되자 은지는 내게 자신의 친오빠 사진을 종종 보여줬는데 뭐 은지 오빠로구나 했다. 아무 감흥이 없었다. 은지는 오빠 사진으로 나와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은 뉘앙스였지만 할 말이 없는 걸. 본디 빈말을 못하는 꼬장꼬장한 성격이라 차마 잘생겼다는 인사치레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나의 무반응에도 의외로 은지는 적극적으로 내게 오빠를 어필하기 시작했다.

  "우리 오빠 장학금 받았어. 여친이 있긴 하지만 난 네가 우리 오빠랑 사귀었으면 좋겠어. 나의 새언니가 되어줄래?"

난 의연하게 은지의 엉뚱한 발언을 늘 웃어넘겼다. 당사자가 좋다는 것도 아니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아니다 싶어 그냥 웃었다. 그렇게 은지는 끈질기게 근 2년 동안 내게 새언니가 되어달라 구애했다. 사진으로 하도 보니 은지 오빠가 눈에 익을 정도였다. 은지는 어느 순간 대놓고 날 새언니라 불렀고 난 은지를 시누이라 부르며 둘만의 역할 놀이를 했다.

  수능 시험 후 이화여대에 붙은 은지는 내게 어느 대학에 붙었냐고 집요하게 물었다. 난 추가의 추가로 지방 국립대에 붙었다 말했더니 은지가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이 반응 뭐지?! 좀 언짢아지려는데,

  "야!! 이건 운명이다. 우리 오빠도 그 대학 다녀! 그리고 여친하고도 헤어졌어."

은지는 방방 뛰며 좋아했다. 나를 포함 내가 대학 붙었다고 좋아한 사람은 은지가 유일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은지는 이제 스무 살이 되니 너도 휴대폰을 사겠다며 폰을 사면 번호를 꼭 알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쯤 되자 은지가 좀 부담스러웠다.

  졸업식 날, 은지는 내게 다가와 오빠도 졸업식에 온다고 인사를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알겠다고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졸업식에 참석한 수많은 인파로 다행히?! 은지 오빠를 대면하지 못했고 그렇게 은지와의 역할놀이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3월의 어느 날  터미널에서 우연히 은지를 만났다. 은지는 내게 폰을 샀는지 물었고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보여주자 번호를 찍기 시작했다.

"이거 우리 오빠 번호야. 꼭 전화해서 만나.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해. 내가 네 얘기는 진작 해놨어."

버스가 도착해 은지와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폴더 폰의 작은 액정에 찍혀있는 낯선 번호를 한참 봤다. 그래. 이 정도면 정말 운명일지 몰라. 일단 저장해놓자! 통화버튼을 누르자니 껄끄럽고 폰을 산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 저장을 하나, 이리저리 버튼을 누르다 그만  번호가 날아가버렸다. 그렇게 은지 오빠와의 연락수단이 영영 사라졌다.

  정신없는 새 학기를 보내고 종강을 바라볼 때쯤 인사대 언덕을 걷는데 멀리서 익은 남자가 걸어왔다. 훤칠한 키에 넓은 어깨가 눈길을 잡았는데 남자와 가까워질수록 나 저 남자를 아는데 누구지? 인사를 해야 되나? 고민하는 찰나  코앞까지 마주하자 비로소 그가 누군지 떠올랐다. 은지 오빠였다. 은지가 늘 앉아있는 오빠 사진이나 얼굴을 크게 찍은 사진만 보여줘서 이렇게 체격이 좋은지 몰랐다. 그랬다. 은지 오빠는 키 180cm가 훌쩍 넘는 훈남이었다. 은지 오빠가 아니냐고 낯선 남자에게 질문을 던질 넉살이 스무 살의 나에겐 없었기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깊은 탄식을 하며 허망하게 바라봤다.

'님아  걸음을 멈춰요. 나예요. 은지의 새언니....'

   그때 제대로 번호만 저장했어도.... 휴대폰이 손에 익지 않은 타고난 기계치는 그렇게 운명의 남자를 놓치고 모태솔로로 대학을 졸업했다는 슬픈 전설을 여러분에게만 조심스레 털어놔봅니다. 시트콤 같은 일상은 이때부터 시작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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