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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을 그대로 담아

바스락바스락

by 류정은 Mar 06. 2025

꽃분홍색 이불이

바람에 펄럭인다.

움직임이 크지 않아
아랫부분만 한 번씩 들썩인다.

어느 집 마당,
열어둔 대문 틈 사이로
우연히 끼어든 시선이
꽤 오래전 기억을 꺼낸다.

볕이 좋은 날,

그것도 길고 지루한 겨울을 보낸 뒤라면,

부지런한 주부들은

그 볕을 가만히 흘려보내지 않았다.


묵혀둔 이불을 꺼내
빨랫줄에 걸쳐둔다.


빨랫줄이 한 번 휘청이며 중심을 잡고 나면,

기다란 막대로 탁탁, 이불을 때린다.


애꿎은 매를 맞은 이불자락이

화들짝 놀라며 요리조리 피하느라

사방에 먼지를 뿌린다.


아이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 나와

이불속에 숨고

야단을 듣고

또 숨기를 반복한다.


햇살 속에 비치는 먼지는
그 숫자가 배로 불어나 보인다.

미세하고 작은 입자가
어지럽게 날렸는데
움직임이 여유로워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신비로웠다.

해가 질 무렵에
이불을 걷는 일은

때때로 아이들의 몫이었는데,


까치발을 하고 겨우 끌어내리면
햇살 아래 따뜻해진 이불이
더없이 포근했다.


잘 마른 이불을

그날의 햇볕과 함께 잘 개어서

장롱 안에 넣어두면

다시 펼칠 때도, 바삭한 냄새가 났다.


*(잠깐 쉬었다가)


평범한 날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평소의 행복>

오늘은, [이불에 깃든 햇볕]을 떠올립니다.




+ 이어지는 곡

카펜터스 [Yesterday Once More]




__



아마 재택 기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집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지영언니에게 카톡이 왔었다.

'잘  마른 이불을

그날의 햇볕과 잘 개어서 장롱 안에 넣어두면

다시 펼칠 때도, 바삭한 냄새가 났다.' 라는 문장을 좋아해 주었다.


언니가 좋아한 것은

청취자들도 좋아한다.


바싹 마른 이불의 기분 좋은 냄새와 촉감을

이불에 숨고 이불 위에서 미끄러지고 이불을 끌어당기며 놀던

각자의 어떤 순간을 그려보길 바라며 썼던 원고다.


이어지는 곡마저

아련했던


2023년 3월 7일 평소의 행복.



어떤 청취자의 요청으로

열어보지 않던 오래 전의 파일을 찾아본다.

같은 날짜의 평소행 원고가 2021년 22년 23년 24년에 있다.

써두고 전부 기억하지는 못해서

열어 보면서도 궁금하고

내용을 확인하고는 '아하 너였구나' 반가워한다.


A4 두 장의

한 줄을 길게 채우지 않고

툭툭 끊어 쓰는 에세이 원고는

다 합쳐도 몇 글자 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날 들으면 가장 좋은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골라

공들여 적었다.


나만의 이야기가 되지 않게 하려고

최대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찾았고


다시 내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세밀하게 묘사했다.


디제이가 읽으면서

이건 내 얘기가 아닌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덤덤하게 거리를 두고 썼다.

가끔은 온도가 더 뜨거웠으면 했다는 디제이의 말은

아마도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며 빈칸으로 두었지만

노래를 듣는 사이 도착하는 청취자들의 이야기가

그 좁은 빈칸을 넘치도록 채워주었다.


거리에서 목격한 어떤 장면에서 시작되어

나에게로 왔다가

디제이를 지나가

다시 청취자의 마음에서

. 내가 원하는 평소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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