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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린 Jan 28. 2024

ep14. 통장 오픈

결혼 전 꼭 나누어야 하는 이야기

사랑이 불타오르던 연애 2개월 차,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게 된 것 같다.


남자친구의 자취방, 그는 이미 출근한 뒤였고 난 느지막이 일어나 세수를 했다.

로션을 바르려고 보니 화장대 위에 흰 종이가 반듯이 접혀 놓여 있었는데, 평소라면 궁금하지 않았을 내용이 그날따라 묘하게 궁금했다.


펴 봐? 말아?

남의 사생활을 함부로 뒤져보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이건 너무 보란 듯이 올려져 있는걸.


호기심이 양심을 이긴 순간, 나쁜 짓을 하려는 아이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후 하 후 하.

누가 볼세라 들숨에 날름 펴보니 이 종이의 정체는 월급명세서.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아, 이걸 봐? 말아?


고민을 하던 찰나의 순간 이미 내 눈은 고민보다 빠르게 수령금액을 스캔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본 것을 후회한다.


.

.

.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천만??

천만???


다시 세봐도 여덟 자리 숫자가 분명했다.


월 천. 쉽지 않은 숫자지.

글쎄, 당신이라면 기분이 어땠을지 모르겠다.

감히 말하자면 그 당시의 나는 타격감과 함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유는 기울기가 적당치 못했기 때문에.


내 월급의 곱절 그 이상의 액수를 매월 벌어들이는 그는 만나는 동안 종종 나에게 결혼에 관한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내왔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건 밑지고 하는 장사가 아니지 않나?

아,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어제까지만 해도 친근하게 느껴지던 남자친구가 왠지 나와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격지심이라 해도 좋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남자친구가 돈 잘 벌면 좋은 거 아냐?라고 하지만 그건 내 돈이 아니다. 남자친구의 돈이지.

결혼하면 되잖아? 아니 그건 네 생각이고. 과연 그가 내 벌이를 알고도 결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까?

자존감을 갉아먹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태 뭐 하고 살았나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고, 상대에 비해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내가 싫었다.

결혼, 돈 없어도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던 그 두 글자가 이토록 큰 부담과 걱정이 되다니.


결단이 필요했다.

이 마음속 짐은 남자 친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오롯이 나의 몫이었고, 대개 이런 것들이 그러하듯 혼자 끙끙 앓고 있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이럴 때 나오는 나의 소신.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솔직함이며, 나는 이번에도 정면돌파를 택했다.


"(탁탁 의자를 치며) 앉아봐, 나랑 얘기 좀 해. 지금부터 내가 얼마를 벌고, 얼마를 모았는지 말해줄게."


갑자기? 상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도 사정이 딱하다.

몇 날 며칠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다 겨우 용기 낸 거니까.


조금의 거짓도 보태지 않고 고하마.

내 통장의 잔액, 그것은 보잘것없고 하찮은 수치였지만 나는 게으르지 않았다.

내가 버는 만큼만 썼고, 착실히 모았다.

그러니 더 이상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테야.

이런 나, 네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럼 우리 결혼하자구!


연인사이에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라며 남자친구는 어색하게 그러나 동시에 아주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내 고백(?)이 끝나자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열심히 살았네."


후... 가스활명수 마신 듯 꽉 막혔던 속이 뻥 뚫림과 함께 나는 안도했다.

드디어 끝났다.

내일부터 네가 날 서서히 멀리하더라도 너를 원망하지 않을게.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 그의 수입에 대해서도 들었다.

(남자친구는 본인이 월 700만 원을 번다고 말했다. 거짓말쟁이. 천만 원 버는 거 내가 다 봤는데...)

(+ 오해의 소지가 있어 말씀드리자면 훗 날, 이 일에 대해 물으니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일부러 금액을 낮춰 말한 것이라 해명했다.)


다행히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남자친구는 나를 멀리하지 않았다.


지난달부터 우리 부부는 통장을 합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하듯, 짝꿍에 비해 한참 모자란 나의 월급도 여전하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주눅들지 않는다. 

나는 늘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열심히 벌어오고 있으니까. (최선이 맞냐고? 맞아, 정말이야!)

작더라도 우리 가계의 보탬이 되고 있으니까.


참으로 말 떼기 조심스럽지만 결혼을 염두하고 있다면 꼭 나눠야 하는 말. 통장 오픈.

오늘은 그 말을 어떻게 꺼냈는지 적어봤다.

분명 누군가는 나처럼 걱정이 앞서겠지. 허나 걱정만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꼭 알아두길.

만약 당신에게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면, 그 사람에게 주저 없이 통장을 까서 보여주자.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털어놓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겁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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