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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린 Jan 31. 2024

ep17. 소원을 말해봐

우리 XX할래?

잠들기가 아쉬워 전화기를 놓지 못하고, 밤새 통화를 해도 졸리기는커녕 눈만 말똥말똥한 시절.

속닥이는 목소리가 간질간질 마음을 간지럽히던 그런 날에 이야기다.


소원이 있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귀가 반짝였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이 밤하늘의 별이라고 못 따다 줄까.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소원을 말해보시오~! 큰소리를 떵떵 치는 내 안에서 동시에 작은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어 나도 있어, 소원.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가 아직 거사(?)를 치르지 못했잖아? (우리 나이가 몇인데 이게 말이 돼?)

하루도 빠짐없이 안전귀가 시키는 남자친구 덕에 괜한 허벅지만 꼬집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온 지난날.

자기야, 자기 혹시 유교보이야? 근데 이걸 어쩌지, 난 유교걸이 아닌데.


야릇한 소원이 있으나 차마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긴 부끄러워 스무고개를 통해 맞춰보자 하였다.

네 소원이라고 내 소원과 크게 다를쏘냐. 너도 남자라면 남자구실 해야지. (응?)


짝꿍 먼저.

첫 번째 고개, 내 소원은 말이야.. 이걸 하려면 돈이 있어야 돼.

돈? 그렇지.. 은밀한 장소를 대여하려면 돈이 필요하지.

두 번째 고개, 용기가 필요해.

용기? 아 물론 용기도 있어야지, 암만~ 그렇고말고.

세 번째 고개, 사람들이 많아.

응..? 사람들?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혹시 취향이..?


뒤로 갈수록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확실한 건 벌건 대낮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해야 한다는 이 행위는 절대 내 머릿속에 있는 그것과 일치할 리가 없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나는 우리의 소원이 같지 않음에 한 번, 그리고 그의 소원이 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에 두 번 흠칫했다.


어렴풋이 알 것도 같지만 김칫국인 것만 같아 스무 번째 고개를 넘을 때까지도 끝끝내 모르는 척을 했던, 그러나 이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그의 소원은.. 결혼..이었다.


“가능하다면 나중에 자기랑 결혼하면 좋을 것 같아.”


그의 홀리(holy)한 소원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프로포즈인듯 아닌 듯 사람 속 다 헤집어 놓는 이 말 한마디에 설레서 쿵 떨어지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다음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내 소원을 말하지 않고 이 대화를 끝내는 것이었다.


“어.. 어? 결혼..? 아 결혼, 결혼 좋지…”

“그냥 그렇다고. 지금 당장은 아니구 나중에~“

“으응, 그래 그래”

“자기 소원은 뭐야?”


안돼. 말할 수 없어.

이건은 나쁜 타이밍이야, 아주 아주 나쁜 타이밍!

너는 나와 결혼하는 게 소원이라는데 내가 어떻게 너랑 XX 하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겠니.


“내 소원은 다음에 말해줄게 ^^;;”


새벽 2시, 이제 그만 졸려서 자야겠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찾아온 적막, 그 가운데 웃음이 픽 났다.

세상에, 결혼이라니.

야릇한 생각이 온 데 간데 없이 도망가고 갑자기 두 발이 지면으로부터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참나,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결혼이래? 하면서도 어디서 결혼하면 좋을지 초록창에 ‘하우스웨딩‘을 검색해보고 있는 나였다. (주책바가지)


그렇게 내 마음속에는 처음으로 우리 사이 ‘결혼’이라는 씨앗이 심어졌고, 어느 날엔 작은 싹을 틔우더니 무럭무럭 자라나 어느새 결실을 맺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의 소원 내가 이뤄준다고 했잖아, 나 약속 지켰다. 맞지?


+

사실 내 소원은 더 빨리 이루어졌다.


“내 소원은 영어야, 두 글자고. 이걸 하면 숨이 가빠지고 땀이 차.“

“…?!“

“이것의 정체가 뭘까?“

“세… 세….ㄱ…세….“


도저히 단어를 말하지는 못하고 쌕쌕거리며 식은땀만 줄줄 흘리는 짝꿍이 귀여워 더 놀리고 싶어졌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러닝이잖아 러닝!”

“아…!!“


(물론 그거 아니지만) 러닝이라 치고, 다음 데이트에 진짜 러닝을 뛰러 나갔다는 사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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