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와 이별하지 않기로 했다

가을의 끝에서, 나를 품다

by 소담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자연은 계절이 무르익으면 금세 이별을 준비하고, 또 다른 계절을 맞는다.

나도 늘 그랬다.

지난날의 나와 이별하고, 더 나은 나를 맞으려 애써왔다.


그런데 문득 자문하게 되었다.

‘과거의 나는 그렇게 별로였을까?’

‘굳이 더 나은 내가 되려 애써야만 할까?’

‘누구나 서툴 수도 있고, 후회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바로 그 미숙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거의 나와 이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마음을 단단히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 대학원에서 과제로 한 시간가량 사례 발표를 했다.

혼자서 발표를 맡는다는 부담감에 며칠을 꼼꼼히 준비했다.

슈퍼바이저 교수님의 피드백이 두려웠고, 선배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앞섰다.

그러다 보니 발표 ‘내용’에만 집중하게 됐다.


발표가 끝나자 교수님이 첫마디를 건네셨다.

“ 선생님은 꼭 상담 일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이보다 더 훌륭한 칭찬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피드백 중에도 재차, 상담 일을 꼭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교수님은 발표 자료를 펼쳐 보였다.

“여기 보세요, 제가 ‘good’이라고 표시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그 말은 단순한 사례 피드백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내가 살아온 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날의 피드백은 전문가로부터 내 삶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내가 어떤 자세로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예상치 못한 성적표였다.

타인의 평가가 뭐 그리 중요할까 싶다가도, 잘 가고 있다고 다독여주는 것 같아 큰 힘이 되었다.

그저 발표를 잘해서 칭찬받은 것보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인상으로 남았다는 사실에 더 뭉클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가을바람이 부드럽게 스쳤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와 이별하지 않아도 되겠다.”


물론 현실에 안주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미 내 안에 있는 자원들을 믿고, 그것들을 다듬어가며 살아도 충분히 멋진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가을이 떠나도, 나는 나와 이별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계절의 끝자락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이별이 꼭 마지막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때로는 나 자신을 품어주며 이별하지 않는 것이, 가장 단단한 시작이 된다는 것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기억과의 작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