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하루가 향기로 기억돼

하루의 연극이 끝나도, 향기는 오래도록 기억된다

by 소담



이 글은 반려견인,
라울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 이야기입니다

【 내 이름은 라울, 나는 반려견이다 】
2부-웃음과 사건이 있는 일상
여덟 번째 이야기- 하루가 향기로 기억돼


불빛이 켜지는 순간, 윤 집사의 무대가 시작된다. 여느 아파트의 평범한 부엌일뿐인데, 스위치를 올리는 찰나 그곳은 금세 극장이 된다. 눈으로도 보고, 향으로도 맡을 수 있는 무대. 윤 집사가 주연이라면, 향기는 언제나 뒤편에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공기를 바꾸며 극의 온도를 달리하는 조연이다.


아침은 어김없이 단출한 메뉴로 열린다. 계란 프라이 두 개, 일일 견과 한 줌, 방울토마토 다섯 알, 커피 한 잔.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지만 그 속은 늘 따뜻하다. 프라이팬 위에서 계란이 지글거리며 흘려보내는 고소한 향은 작은 공간을 금세 포근하게 감싼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식탁 근처로 슬며시 다가간다. 혹시라도 노른자가 흘러내리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를 품으면서. 그러나 윤 집사의 한마디가 먼저 다가온다.

“라울, 안 돼.”

짧고 부드러운 그 말에 나는 꼬리를 천천히 내리고 물러서야 한다. 반숙 계란의 노른자는 잘 주면서 무엇 때문인지 기름에 튀긴 고소한 계란노른자는 맛도 못 봤다. 여전히 내 몫은 없었지만, 고소함과 상큼함이 뒤섞인 향기가 이미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순간, 따뜻한 공기 속에서 아침의 연극은 조용히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무대의 진짜 전성기는 저녁이다. 퇴근한 윤 집사가 앞치마를 두르는 순간, 공간은 다시 화려하게 변신한다. 도마 위 채소가 ‘탁탁’ 썰리는 소리는 경쾌한 리듬이 되고, 프라이팬에서 기름이 ‘치이익’ 튀는 소리는 힘찬 박수가 된다.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수증기는 마치 막이 오르기 전, 무대를 가득 채우는 연무 같다. 그 리듬에 맞춰 향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달큼하게 볶아지는 양파, 노릇하게 익어가는 마늘, 기름에 닿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고기… 주연과 조연이 어우러지며 저녁의 연극은 완성된다.


가끔 윤 집사는 장난스럽게 말한다.

“라울,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고기야.”

그 한마디에 귀가 쫑긋 선다.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는 내 마음까지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향만으로도 벌써 배가 부른 듯한데, 막상 그릇에 조금 담아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기다림은 길었지만, 맛보는 순간은 짧다. 그러나 그 짧음이야말로 오래 남는다. 짧기에 선명하고, 선명하기에 더 깊이 기억된다.


향기는 단순히 배고픔을 자극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하루의 기록이자, 오늘을 알려주는 신호다. 고기 굽는 냄새가 진하게 번지면 가족이 모이는 저녁이고, 버터가 은근히 졸아드는 향은 빗소리와 함께하는 따뜻한 식탁을 예고한다. 과일 향이 감돌면 식사 뒤 작은 축제가 준비되어 있음을 알린다. 향은 식탁 위의 메뉴를 넘어, 하루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대사다.


계절이 바뀌면 향도 달라진다. 봄에는 냉이 향이 파릇파릇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여름에는 오이냉국의 청량함이 공기 속을 맴돈다. 가을 저녁엔 버섯전골 향이 스산한 바람을 막아주고, 겨울엔 갈비찜 냄새가 창문 밖 눈발을 녹일 듯 퍼진다. 향은 계절을 담고, 계절은 다시 나의 삶에 스며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요리가 끝난 뒤다. 접시는 식탁 위로 옮겨져 젓가락들이 분주히 오가지만, 공기 속에는 여전히 향이 남아 있다. 그 잔향 속에는 재료들이 만나 하나의 음식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마치 커튼콜을 받고 무대에 다시 오른 배우들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장면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식사가 끝난 후에야 더 깊은 향을 느낀다.


사람들은 부엌을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곳’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나에게 그곳은 감각의 무대이자, 하루의 분위기를 입히는 작업실이다. 도마의 리듬, 피어오르는 수증기, 그리고 향기의 조연들이 만들어내는 장면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도 윤 집사의 무대는 열린다. 무엇이 차려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어떤 향이 오르든, 그 무대 속에는 언제나 윤 집사의 웃음과, 나를 향한 따뜻한 손길이 함께 들어 있을 것이다.


연극은 끝나도, 향기는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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