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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Nov 24. 2019

관계의 법칙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의 자리는 어쩐지 어려웠다. 그 사람이 알던 그때의 내가 아닌데 왠지 그 기대에 어긋나서는 안 될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 역시 그랬다. 대화의 접점을 찾기 위해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손뼉 치며 좋아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에 안도감을 느끼는 모든 과정을 반복했다.   

오래전 인연이 나를 찾아주는 것이 예전에는 고마웠다. 이 사람에게 내가 이 정도의 위치를 갖는다는 것이,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 고마웠던 것이다. 이제는 이 모든 절차가 그저 귀찮고 번거롭기만 하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사람을 다시 만난 적이 있다. 솔직히 그 사람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시간은 나에게 너무나 간절했다. 그 사람과 내가 왜 이별했는지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흔하디 흔한 성격차이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그 사람은 서로의 극단적으로 다른 성격에 끌렸는데 막상 만나보니 아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연기한 밝고 털털한 성격에 그 사람이 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의 가면을 보고 좋아했을 뿐이다. 하지만 진짜 모습은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연중에 튀어나오는 상처 많은 나의 모습은 서로에게 버거웠고 결국 관계는 끝나버렸다. 


가끔 생각했다. 진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는 아직 함께 하고 있을까. 어쩌면 애초에 나를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오히려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다시 만난 그 사람 앞에서, 나는 편안하게 내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실망할 것이 두려웠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 순간, 최대한 좋은 사람으로,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편안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도 그 과정을 반복했다.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가 공감할 만한 주제에서 손뼉 치고 웃으며 안도감을 느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는데 정리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그 만남은 끝나버렸다. 넌 여전하네.라는 그 사람의 말이 오래 머물렀다.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 기억할 나의 모습은 결국 가짜일 것이다. 


대화 도중, 찰나의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이 관계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진짜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그건 그저 서로가 적당히 연기하다 도달한 합의점일 뿐이었다. 

사람들과 맺는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나는 늘 밝고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싶었다. 오래 기억에 남고 싶고 오래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혼자였고 모든 연극은 끝나버렸다.


생각해 보니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언제나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가.’가 우선이었기에. 좋은 사람으로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가 없다면 앞으로 나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져야 할까. 과거에 맺어진 관계들은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까.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틀렸다. 시간은 모든 것을 무디게 만들 뿐 없던 일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절실했던 순간이 시간이 지난다고 잊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생채기를 남긴다. 큰 사건을 겪기 전과 후의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인 것이다.

시간은 모든 문제를 만든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결국 나의 몫이 되어버린다. 시간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나는 성숙하기를 택할 수도 있고 아픔에 질식하기를 택할 수도 있다. 그저 버티며 잊히기를 바랄 수도 있다. 


가짜 나로 맺은 관계들을 다시 돌아본다. 그 순간 나는 버티며 잊히기를 택했었다. 진짜 내 모습을 감출 수 있기를, 나조차 나를 잊기를 바랐다. 그 모든 순간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이제와 다른 길을 선택한 순간, 과거의 모든 것들이 내 몫의 후회로 따라온다. 


후회의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그때 솔직히 내 마음을 전했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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