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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Jun 03. 2021

독립 일기(6)

과거를 성찰할 여유

나는 에필로그를 바라며 살아왔다.

갈등이 일어나고 위기에 빠지고 현명하게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모든 과정은 생략하고, 아니면 갈등 따위 아예 일어나지도 않고 그저 평화롭고 아늑한 에필로그 속에 머물고 싶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아픔을 피하고 싶었다. 내 삶에 이미 쌓인 아픔도 많았는데 굳이 다른 갈등까지 겪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픔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갈등과 그로 인한 아픔은 필연적인 것이었고 피하려 하면 할수록 아주 작은 자극에도 흔들리기 일쑤였다.    


휘청이고 주저앉으며 삶을 헤매는 동안 내 삶은 도무지 나아지질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만 빼고 모든 것이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평생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모든 것들에게도 끝이 있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그 규칙은 내게도 예외는 아니라서 돌이켜 보니 어느 순간 지나있었다. 이제 떠올려도 무덤덤해질 정도로 시간이 지난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힘든 시기를 지난 지금이 내 인생의 에필로그라고 할 만하냐면 그렇지도 않다.

어쩌면 나는 ‘에필로그’라는 단어에 큰 환상을 품었던 것 같다. 누군가와 비교했을 때 손색없을 만큼 당당한 나의 모습을,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내가 이룬 업적들을 모두 다 가진 상태가 에필로그라고 여겼으니까.     


그때의 나는 내가 꿈꾸는 ‘에필로그’가 실현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 여겼다.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 익숙했던 터라 언제나 스스로에게 ‘행복할 자격’이라는 잣대를 들이미는 경우도 많았다.    

 

현재의 나는 어떠한가. 나는 그 환상의 ‘에필로그’에 이르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만큼 큰 성공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변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다.

꿈꾸던 큰 집에 사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를 더 알게 되었고 나 스스로 나에게 더 이상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지 않는다. 나의 몸과 마음을 돌보게 되었고 나의 삶을 돌이켜볼 여유도 생겼다. 

절정으로 아팠던 시기를 지나 이제야 한숨 돌리고 나 스스로 나를 다독이게 된 기분이다.     


나만의 공간에서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지나온 길을 되새기며 나에게 애틋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넌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는 걸 그때도 알았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때의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에필로그는 없단다. 그러니 더 자유롭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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