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지도

by 거문고

진짜 관계는 상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시작된다. 지금껏 내 삶은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에 애쓰며 흘러왔다. 상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상대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창 시절에는 쉬는 시간을 함께 보낼 누군가가 있는지, 점심을 같이 먹을 친구가 있는지, 소풍 가는 버스에서 함께 앉을 친구가 있는지, 함께 돗자리 깔고 도시락 먹을 친구가 있는지가 안정적인 관계의 기준이었다. 나는 그 관계에서 늘 불안해해야 하는 변두리의 사람이었다. 매일 같은 무리와 점심 도시락을 먹는다는 것이 중요했던 시기였기에 나는 그 무리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친구에게 공감하고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들의 마음에 드는 대화를 나눌지, 어떻게 하면 겉돌지 않을지에 집중했다.


일상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나는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은연중에 학창 시절의 친구들에게 질투를 느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제 때 월급 나오는 직업을 가진 아빠가 있는 친구들이, 매년 생일파티를 여는 친구들이,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받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는 자존심을 지키는 선에서만 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때로는 거짓을 덧붙였다. 친구들이 내 상황을 알지 못하도록, 나를 동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누군가의 뮤즈를 꿈꿨다. 내가 노력하면, 내가 나를 쏟아부으면 가능할 거라 여겼지만 받기를 바라고 준 것은 더 큰 결핍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내가 받고자 한 것은 나의 모든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부모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부모는 가장 결정적인 나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저 내가 보여준 순간의 모습만을 믿을 뿐이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면, 당연히 다른 부분은 알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조급하게 다가갔다. 누군가와 빠르게 안정적인 관계를 맺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순간 내 마음은 불안했고, 성급했다. 이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빨리 상대에게 중요해지기 위해. 하나의 관계가 깨지는 것은 나를 더 공허하게 만들었고 그 공허를 새로운 관계로 메웠다. 사회생활하며 만들어진 수많은 모임들에 모두 참석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에겐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내가 필요하길 바랐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찼다. 혼자 남겨지지 않기 위해 했던 수많은 행동들. 내가 원해서 간절하게 이어왔지만 오히려 상처로 남은 관계들.


나는 누군가의 뮤즈를 꿈꿨다. 그래서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지 못했다. 상대의 행복이 나로 인해 완성되길, 내가 빠진 삶은 나와 같이 공허하길 바랐다. 결핍은 소유를 갈구하게 만든다. 필연적으로 집착으로 이어진다. 상대의 성공을 바라지만 동시에 실패도 바랐다. 나와 함께 한 시간이 최고라고 여기길 바랐다.

내가 아닌 최고의 것들은 사람들의 삶에 끊임없이 찾아왔다. 누군가는 가정을 이루었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으며 누군가는 세계여행을 떠났고 누군가는 오랫동안 꿈꿨던 직업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쿨한 척 작별을 했다. 언젠가 밥 한 끼 하자는 말과 함께.


아름다운 피사체를 꿈꿨다. 누구나 찍고 싶고 간직하고 싶어 할 만한 피사체가 되기를. 관계에서조차 대범하지 못하고 수동적이었던 나는 내가 누군가를 간직할 용기는 내지 못했던 것이다.

사소하고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며 이제야 알게 됐다. 누군가를 들였다 내보내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다. 이별을 누가 먼저 말했든, 누가 의도했든 상관없이, 그 관계에 발을 들인 이라면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다. 다만 얼마나 순도 높은 감정으로, 솔직한 마음으로 대했는지가 얼마나 오랫동안 힘들지를 결정한다. 더 많이 사랑한 쪽이 더 많이 상처 받는다고 했던가. 사랑해서 상처 받은 것이 아니라 더 받기를 바랐기에 상처 받았는지도 모른다.


keyword
이전 04화순간의 인연 받아들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