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라는 환상

by 거문고

학창시절, 우정이라는 것은 나에게 언제나 어려운 문제였다.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친구들의 고민들이 나에겐 너무나 사소하게 느껴졌고 때로는 부럽기까지 했다. 돈 때문에 싸우지 않는 부모가 있는 것만으로도, 자기 방이 있는 것만으로도 친구들의 고민은 나에겐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친구가 없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 불편함이다. 쉬는 시간에 함께 이야기 할 대상 없이 두리번거려야 하는 것, 소풍갈 때 같이 도시락 먹을 친구가 없어 괜히 눈치 보는 것, 주변 어른들이 내가 친구 없는걸 알까봐 전전긍긍하는 것과 같이.


학창시절에는 주로 쉬는 시간에 책 읽는 척을 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동정어린 눈길로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끔 선생님이 같이 앉고 싶은 친구와 자유롭게 앉으라고 하면 언제나 남은 아이와 짝이 되었다. 차라리 혼자 앉는 것이 편하고 좋았을텐데 그러자니 나를 보는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주변에 친구가 없는 것을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친구 없는 아이, 소외된 아이로 비춰지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나를 다 내 보일만큼 솔직한 적은 없다. 언제나 내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적당한 가면을 쓴 채 친구를 만났다. 결국 외롭지 않기 위해 누군가와 어울렸지만 그 관계 안에서 내가 느낀 것은 잠시의 안도와 깊은 공허였다.


나에게 타인은 언제나 나보다 앞선 사람이었다. 내가 뭘해도 항상 나보다 한 발 앞선 사람.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기쁨에 함께했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나와 친구들이 더 멀어지는 것이, 나보다 더 앞서나가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상대의 아픔을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 빛나는 대상이 되어 나와 멀어지는 일은 없기를 바랐던 것이다.


누군가가 말하는 진실한 우정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없었다. 친구의 진정한 행복을 바란 적도, 그들이 나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 적도 없다. 그저 내 옆에 함께 해 주길, 나의 외로움을 해소시켜주길 바랐을 뿐이다.

친구들과 나누는 신변잡기적 대화가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나를 가볍게 만들어 주었을 뿐, 집에 혼자 있는 나는 여전히 무겁고 아팠다. 언젠가부터는 혼자 있는 시간을 버틸 수 없어 항상 누군가를 만났다. 나 역시도 그들의 필요를 거절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나를 배려심 많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내가 남들보다 배려심이 많아서도, 그들을 많이 좋아해서도 아니었다. 혼자인 것이 두렵고 외로웠을 뿐이다. 친구들에게 내 시간을 많이 쏟아부을수록 동시에 그들에 대한 서운함도 커졌다. 나는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너희는 왜 나와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냐고 혼자 원망을 터뜨리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변에 사람은 많아지고 모임도 많아졌다. 나는 스스로 모든 모임에 참석하고 모두와 잘 지내려 애썼다. 그들에게 받는 인정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과는 진짜 친구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찌보면 맞는 말이다. 서로의 계산속에 맞게 만난 사람이니.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애초에 친구들과도 솔직한 관계를 맺지 못했기에 사회생활에서 만난 사람이라 한들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헤어짐은 나에겐 언제나 아팠지만 사람들에게는 쉬워보였다. 해가 가면, 거리가 멀어지면, 결혼을 하면 당연히 멀어지는 거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관계를 끊어내고 혼자 새로운 관계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스스로를 아날로그적 사람이라 칭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와의 유대감을 갈구했을 뿐이다.


내가 어딘가 속해 있다는 안정감, 나도 다른 상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관계를 통해 느끼고 싶었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그 관계를 봉인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는 것은 없었다. 새로운 관계가 생길수록, 과거의 관계와 멀어지지 못할수록 내가 잘 보여야하고 신경써야 할 대상은 늘어만 갔다.


친구라는 이유로 누군가는 쉽게 충고를 했다. 먼저 경험해 봤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선입견을 가졌다. 나보다 나은 모든이들의 의견이 나의 삶이 되었다.


그 모든 사람들의 삶을 수용하는데 지쳐 나는 관계를 하나씩 내려놓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결 편해졌다. 가짜 나를 내보일 대상이 없어진다는 것만으로도 만남에 대한 부담이 줄었다. 나에게 친구라는 것은, 가족에게 받지 못한 인정과 사랑을 대신해서 주고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한 존재였다. 나의 실수에 관대하고 괜찮다고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주고 때로 중요한 삶의 순간에 내가 실수 하지 않도록 도와줄 사람.

지나고 보니 그것은 친구라는 이름에 덮어씌운 나의 환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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