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담 May 24. 2020

가난을 언급하는 데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면

나는 갈 곳이 없다


 나는 교육열이 엄청나던 시대에, 그 엄청난 교육열이 집합된 듯한 지역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영어시험을 한 문제 틀리면 순식간에 그 과목 등수가 몇십 등까지도 떨어지는 살얼음판 같던 학교였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당시엔 체육 과목도 내신에 들어갔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라 점수가 나쁘지 않았는데, 내가 유난히 힘들어했던 학기는 농구를 배우는 학기였다. 1분 동안 자유투를 던져 들어가는 개수로 등급을 나눠 점수를 매기는 수행평가였는데,  실력이 늘지 않아 초조해하던 내 마음과 달리 체육선생님은 너무 여유로우셨다. 농구골대의 네모난 칸 안에 맞게끔 던지면 된다며 우리를 한 줄로 세우고는 돌아가면서 한 번씩 던지라고만 하셨다. 그때 눈에 띄게 자유투를 잘 던지는 다른 반 여자애가 있었는데, 공부도 잘한다고 이미 학교에서 유명하던 아이였다.


"야. 쟤는 무슨 농구까지 저렇게 잘해?"라고 친구한테 얘기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뜻밖이었다.


"쟤 저거 학원에서 배운 거잖아."


 몰랐다. 체육도 학원에서 배우는 과목인지. 학교 근처의 한 학원에서 돈을 받고 우리 학교 체육 수행평가에 맞춰 개개인별로 과외 수업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야 그 학원 수강료가 얼마였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꽤 비쌌던 걸로 기억한다. 기계처럼 던지는 족족 골대에 골인하는 그 아이의 자유투를 보면서, 내 안엔 오기가 생겼다. 나는 그런 학원을 다닐 돈은 없지만, 내가 노오력으로 쟤를 한 번 넘어보겠다.


 농구를 연습하려면 농구공이 필요했는데, 학교에서는 점심시간에만 농구공을 꺼내 연습할 수 있게 해 주었어서 매일 점심을 급하게 먹고 운동장에 가서 혼자 자유투 연습을 했다. 그렇게 수행평가 날이 다 될 무렵에는 1분 시간을 재며 던져 보았을 때 무난하게 만점을 받을 수 있을 개수가 나왔다.


 그런데 수행평가 날, 너무나도 긴장한 나머지 평소에 못 미치는 공 개수만큼 골대에 넣었다.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나왔다. 선생님께 한 번만 더 던지면 안 되겠냐고 말씀드렸다. 안다. 형평성에 맞지 않으니 당연히 안 되는 일이라는 걸. 그래도 내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그 뒤 내 중학교 시절이 어땠냐고? 매일을 악착같이 집에서 혼자 공부했다. 반 친구들이 거북이라고 부를 만큼 큰 등산가방에 매일 그 날 배운 교과서를 가지고 다니며 교과서를 다 외워 버릴 정도로 공부했다. 그렇게 마지막 기말고사에서는 열 과목이 넘는 과목에서 딱 한 문제만 틀리며 전교 1등을 했다. 졸업식 때는 자유투 기계 같던 그 아이와 함께 상을 받았다. 물론 등수는 내가 더 낮았지만, 당시에 그건 별로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처음으로 느꼈던 뭔가를 극복해냈다는, 이뤄냈다는 성취감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 집의 가정환경이 어땠냐고 한다면, 나는 그냥 평범했다고 얘기하고 싶다. 끼니를 굶어야 하나 같은 삶이 걸린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어려워하는 과목의 단과학원을 하나씩 다닐 정도의 형편이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읽는 이에 따라 부유했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근데 학창 시절에 나는 성적이 늘 전교권이었고, 나와 1등을 경쟁하는 아이들은 다들 정말이지 부유했다. 모든 과목을 대치동의 유명한 학원, 유명한 강사에게 수업을 받았고, 매 시험기간이면 그 학원에서 아이들을 위한 맞춤 문제집을 만들어 주었으며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이 차를 가지고 오셔서 아이들을 태우고 갔다.  우리 부모님은 항상 일하느라 너무 바빴다. 학교 끝나고 마중 한 번 나오신 적이 없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건, 상대적 가난 정도였다고 말하면 적당할 것 같다.


 고3이 시작되는 겨울 방학 때, 학교에서 자기소개서를 써오라고 시켰다. 첨삭하는데 시간이 꽤 걸리니, 미리부터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 당시 1번이 성장환경과 본인의 성격을 적는 질문이었지 싶다. 학창 시절에 주위 친구들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내가 가난해서 공평한 경쟁이 아니라고 느낀 적이 많았지만, 나는 그걸 극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했다.라고 쓴 부분이 있었다. 다음 날에 학교 선생님이 부르길래 교무실로 가니, 그 부분을 다 뺐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왜냐고 물었을 때 들었던 그 선생님의 답이 아직도 기억난다.


"너, 라코스테 신발 신었잖아. 우리 어릴 땐 집에 밥이 없어서 살아갈 걱정 하는 애들도 태반이었어. 근데 그런 신발을 신은 네가 가난했다고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니?"


 지금도 모르겠다. 당시에 내가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느꼈다는 게 내가 잘못했던 걸까. 그렇다면 내가 학창 시절, 다른 아이들과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내 커브길만 유독 커브가 심하고, 내 출발선만 저만치 뒤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느꼈던 건 무엇이라 설명해야 했을까.


 그 선생님이 지적한 라코스테 신발은 내 것이었지만 내가 산 게 아니었다. 친척 중에 잘 사시는 친척 분이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주신 거였다. 그런 걸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알겠다 하고 나와서 그 문단을 통째로 날렸다.


 그 이후에, 수능을 평소보다 망쳐버린 탓에 반강제적으로 재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수능이 유난히 쉬워 90점에도 4등급이 나오던 해였고, 학교엔 나처럼 재수를 선택한 아이들이 많았다. 수능이 끝나고 한 달쯤 쉬다가 유명한 재수학원 여기저기에 아이들이 등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한 달에 백만 원이 훌쩍 넘는 그런 학원을 가고 싶다고 집에 말하기도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 집안 사정이 그맘때쯤 가장 좋지 않았다. 아빠의 회사가 망했고, 엄마의 수입은 일정치 않았다. 정말 혼자 해도 괜찮겠냐는 부모님의 물음에 잘할 수 있다며 웃어 보였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유명한 재수 학원에 가고 싶은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집에서 독학재수를 시작했다. 매일 학원에 가듯이 스케쥴을 맞춰 혼자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그 한 해는 매일을 억누르려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불안감과, 매일매일을 스케줄러에 한 시간 단위로 계획표를 짜 지켰음에도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을까 하고 끝도 없이 드는 의심과 혼자 방 안에서 싸워야 했다. 하루에 햇빛 잠깐 보러 밖에 나가는 시간마저 사치라고 생각하며 버틴 1년은 무엇보다도 마음이 지독히도 가난했던 한 해였다.


 다행스럽게도, 재수 생활 후에 나는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과는 재수생이 많은 학과였는데, 그중에 독학재수를 해서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학기 초라 서로 할 말이 없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어딜 가나 재수 어디서 했냐, 그래서 독학 재수했다고 하면 왜 독학재수를 했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제가 좀 독해서요."

라고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난 진짜 독한 애다.


 얼마 전 한 작가의 글을 읽었다. 가난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면 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99만 원의 월급을 받으며 그중 집세와 식비를 제하고 나면 20만 원 내외의 돈이 남는다며 집주인이 보증금 천만 원을 올려달라는 말에 살 길이 없어 욕이 나왔다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이 작가 용감하고 솔직하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댓글을 보니까 평소에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홍대에 일억이 넘는 전셋집에 살면서 가난을 얘기하냐고 비아냥 거리는 댓글이 있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전세 사는 사람은 가난을 얘기하면 안 되는 건가.


 궁금하다.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은 누가 부여하는가. 왜 우리는 가난이라는 단어에 예민한 잣대를 들이밀며 그게 가난한 게 맞냐고 윽박지를까. 그냥 누구에게나 상대적으로 느끼는 가난함이 있고, 또 지금 세상이 그렇게까지 여유롭게 살만한 세상이 아니며, 저 사람은 그랬구나 정도로 봐줄 수는 없는 걸까.


 누구에게나 살면서 그게 물질적인 거든, 정신적인 거든 가난한 시절이 있지 않은가.


 얼마 전 대학의 지도교수가 이번 학기 설문지라며 보내준 파일에 1번이 본인의 가정환경과 성장환경을 쓰라는 거더라. 요즘도 이런 걸 쓰나 싶었지만, 비어두긴 뭐하니 답을 적기 시작했다.


 아주 못 살지도, 그렇다고 아주 잘 살지도 않습니다. 갖고 싶은 걸 다 가지진 못하지만, 갖고 싶은 것 그중에서도 골라서 정말 갖고 싶은 건 가지고 살며, 하고 싶은 일도 적당히 이루며 삽니다.라고 써서 보냈다.


 교수는 내 답변이 마음에 들었을까.

 

 


이전 10화 그냥 차를 버리고 싶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