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박정희와 배순훈
인기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 덕선이가 연탄가스에 중독된 장면이 있다. 다행히 겨우 방을 빠져나와 동치미를 마시고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 코믹하게 그려져 있다. 덕선이의 강인한 생명력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아찔한 상황이다.
웃으며 넘어가기엔 70~80년대 연탄가스로 생명을 잃은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통계를 보면 지금까지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6만 명이 넘고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부상자가 300만 명에 달한다. 드라마이니 코믹하게 연출한 것이지만 연탄가스 중독은 정말 심각한 사안이었다. 요즘 산업재해로 단 한 명만 사망을 해도 사회적 파장이 이는 것에 비하면 정말로 엄청난 사회적 문제였던 셈이다.
이런 연탄가스 중독 사고를 막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 박정희와 배순훈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배순훈 박사는 누구인가? 90년대 대우전자 대표를 지낸 분으로 ‘탱크주의’를 표방하여 단순하지만 튼튼한 제품을 만들겠다고 직접 광고모델로 나서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런데 이 분이 연탄가스 중독을 막았다고 하니 흥미롭다.
1973년,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600만 불의 장기교육 차관을 받아 홍릉에 한국과학원(KAIS)을 세웠다. 어느 날 박정희는 과학원을 순시하던 중 MIT공대를 졸업하고 과학원 교수로 부임한 배순훈 박사를 만났다. 박정희는 그에게 연탄가스 중독을 막을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하명이니 어찌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 배순훈 박사는 과학원에 모형 집을 지어놓고 연구에 매진했다. 하지만 연탄가스, 즉 일산화탄소는 무색무취의 가스상 물질이어서 막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연탄가스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보고를 하자 박정희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말고, 되는 방법을 찾으라”고 다시 지시하였다. 이에 배순훈 박사는 다시 연구를 시작하였고 드디어 ‘새마을보일러’를 개발하였다. 이전에는 연탄불을 아궁이 밑에 넣어서 방을 직접 데우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방바닥에 틈이 있으면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올 수 있다. 이걸 지금처럼 물은 부엌에서 데우고 뜨거워진 물이 방바닥에 깔린 호스를 따라 순환하면서 난방이 되는 구조로 바꾼 것이다. 연탄 화덕이 밖에 있으니 연탄가스에 중독될 위험이 엄청나게 낮아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대통령이 과학원에 가서 부탁한 게 연탄가스 중독 방지라는 것이다. 하기야 해마다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판이니 어쩌면 정권차원에서도 중대한 문제였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사고를 당연한 사고라 여기지 않고 민생을 살핀 점은 평가할 만하다.
두 번째는 배순훈 박사의 접근 방식이다. 난방 방식을 그대로 두고 연탄가스를 막으려는 방법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추측이지만 일산화탄소가 들어오지 못하게 철저히 밀폐하거나 밖으로 잘 빼내는 방법을 먼저 찾아봤을 것이다. 이 방법이 실패하자 아예 난방 방식을 바꾸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대통령의 독려(?)가 있었지만 말이다.
지금 산업보건은 어떠한가? 세척제 중독 사건을 보면 산업보건에서 아무리 환기를 잘해도 원인이 바뀌지 않으니 완전한 대책이 아니다. 물론 환기는 중요하지만, 만약 작업방법을 바꿔서, 근로자가 직접 전자부품을 세척조에 담갔다 빼내는 방식이 아니라 세척은 밀폐된 곳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을 쓴다면 근로자가 유독한 물질을 들이마실 일이 아예 없는 것이다.
문제는 산업보건과 생산과의 관계이다. 실제 산업현장에서 근로자의 건강을 위해 생산방식을 바꾸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 산업보건의 역할은 생산공정은 그냥 두고 환기나 잘하고 보호구 착용 등의 관리만 잘하도록 하는 것이다. 생산방식을 바꾸는 것은 생산부서의 역할인데 만약 생산부서에서 안전보건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생산부서에서 안전보건에 대한 인식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세척공정에 보건상 문제가 있으니 생산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하면 과연 생산부서에서 그런 방식을 고민할까이다. 지금처럼 중독자가 수십 명 발생한다면 당연히 뭔가 조치를 취하려고 하겠지만, 아직 중독자가 발생하지 않은 이전 시점에서 산업보건전문가가 중독 위험이 있으니 예방적으로 생산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 누가 그 말에 귀를 기울일까?
칠팔십 년대 연탄가스 중독은 사회적 재앙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고 정치 지도자가 과학계 최고 인재에게 기술적 해결을 주문했다. 그는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여 이 문제를 마침내 해결하였다. 이제는 산업보건도 기존의 관리적 접근방식이 아닌 생산방식의 변경을 항상 염두에 두고 개선을 고민해야 한다. 말단에서의 대응은 한계가 분명하다. 본질을 잡을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할 때이다. (23.1.1, 2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