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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굴레, 꽃과 향기

[양촌일기]

by 소똥구리

둥굴레차 향기가 베란다 서재를 가득 채운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향기이다. 커피향보다 부드럽고 편안하다.

꽃 피운 둥굴레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 보았어도 그 예쁜 꽃이 둥굴레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둥굴레 하면 구수한 차로 기억되고 초현실적으로 예쁜 둥굴레 꽃을 보면 금강초롱이나 난초의 꽃을 떠올릴 것이기에 그 둘을 연결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둥굴레는 그 꽃의 화려함과 여리함에 비해 아무 데서나 잘 자란다. 내곡리 밭 아무 데나 피어난 둥굴레를 보고 꽃이 예뻐서 한쪽에 옮겨 심었다. 다시 봄이 오니 여기서도 거기서도 잘 자랐다.


올봄 언덕 위로 올라가는 산책길을 둥굴레 꽃길로 만들 생각이었다. 초봄 초록 새싹이 솟아나고 조금 지나 하얀 꽃들이 초롱초롱 피어나는 장면을 상상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둥굴레는 그저 ‘작물’이었다. 지난가을 밭에 가니 아버지가 열심히 둥굴레를 캐고 있었다. 이런! 내년 봄 둥굴레 꽃길을 만들려 했더니 아버지가 쇠스랑에 모두 뽑혀 버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는 아버지의 밭이고 아버지에게 둥굴레는 작물이니. 아버지는 둥굴레 뿌리를 깨끗이 씻어 나누어 주었지만 처음 보는 생 둥굴레 뿌리는 처치곤란이었다.


지난겨울, 눈이 내리고 며칠 지나 밭에 갔다. 밭에는 아직 눈이 쌓여 있었다. 비닐하우스 난로에 먼저 불을 피웠다. 겨울에는 특별한 밭일은 없다. 불이 살아나는 동안 하우스를 바닥을 깨끗이 쓸고 삽이며 호미며 농기구를 정리하고 있는데 무언가 향기가 느껴졌다. 은은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강렬한 향이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큰누나가 난로 위에 커다란 팬을 올리고 무언가를 볶고 있었다. “향기 좋다, 뭐야?” 물으니 둥굴레란다. 둥굴레 끓인 물을 마셔본 적은 있지만 둥굴레 덖는 것은 처음 보았다. 불을 만난 둥굴레의 향기는 탄성을 자아냈다. 무취의 둥굴레가 불을 만나니 죽어가는 감성세포를 살려내는 기가 막힌 향기를 내뿜었다. 그렇게 장작불에 덖은 둥굴레를 형제들 수만큼 나누었다. 투명한 둥근 플라스틱 병 안에 들어 있는 둥굴레는 그 자체로 작품이었다.


설 연휴를 맞아 여유가 생겼다. 주전자에 물을 반쯤 넣고 큰누나가 덖은 둥굴레를 한 움큼 넣었다. 잠시 후 온 집안이 둥굴레 향기로 가득 찼다. 따듯하고 향기로운 둥굴레차를 들고 베란다 서재에 앉아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남은 둥굴레는 작은 유리병 세 개에 옮겨 담았다. 누굴 만날지 모르지만 누군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선물하고 싶어졌다. 전해주고 싶은 것은 한 줌의 둥굴레가 아니라 공간을 가득 채우는 향기였다.


지난주, 산책길을 따라 둥굴레 씨앗을 뿌리고 밭 여기저기 자생한 둥굴레를 옮겨 심었다. 이번 주에는 꽃을 볼 수 있을까? 밭에 가는 즐거움이 하나 더 생겼다. (25.1.26, 25. 5.16)






사진_둥굴레꽃@소똥구리(25.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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