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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상샬롬 Aug 22. 2020

생 선지를 처음 본 남편은

15년 차 동갑내기 부부의 결혼생활 이야기 17

  며칠 전 남편과 마장동 근처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근처 마장동 축산시장에 다녀왔다.


  우리 부부 둘 다 선짓국을 워낙 좋아했기에 시장에서 싱싱한 생 선지를 사서 맛있게 얼큰한 선짓국을 끓여먹자고 했다. 남편은 좋은 생각이라며 신이 났다.


  몇 년 만에 온 마장동 축산시장은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다양한 부위들의 고기와 부속물들이 엄청 많았다.


  이것저것을 열심히 구경하다가 생 선지를 발견했다. 예전에 엄마 따라 재래시장에 다니면서 엄마가 생 선지를 사는 모습도 보고 네모난 철통 안에 든 생 선지를 파는 모습도 자주 본 터라 오랜만에 본 생 선지가 참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와, 여보. 선지가 엄청 빨갛다. 무섭게도 보이네."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네."라고 했다.


   나는 두세근 정도 달라고 했고 사장님은 봉지 두 개에 시뻘건 생 선지를 담아 주시고 국물이 샐 수도 있다며 한 번 더 봉지에 담아 주셨다. 무게가 제법 나가니 남편은 자기가 두 봉지를 다 들고 차를 세워둔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남편이 좀 이상하게 말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왜 그러냐고 묻자 남편은 조리가 다 된 국에 갈색 선지만 봤지 오늘처럼 시뻘건 생 선지를 본 것은 태어나 처음이라 지금 충격 상태라는 것이다. 허허. 덩치도 크고 키도 큰 남편이 이럴 땐 또 귀엽네.


  잠시 후 차에 도착한 남편은 선지가 든 봉투를 뒷좌석에 잘 두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런데 엉? 남편의 얼굴을 보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다. 그러더니 운전대를 잡고 고개를 푹 숙이면서 하는 말

"여보, 나 잠시만 쉴게. 울렁거려서 바로 운전을 못하겠네."


  나는 아까 남편이 충격 상태라고 했을 때 반은 장난인 줄 알았는데 이건 진짜구나. 이 사람 정말 생각보다 더 생으로 된 선지를 본 충격이 컸구나 라고 느껴지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십여분 정도 엎드려 쉬던 남편은 이제 괜찮아졌다면서 집으로 차를 몰았고 무사히 집에 잘 도착했다. 나는 남편이 생 선지가 든 봉지를 보면 또 힘들어할까 봐 내가 들고 들어가겠다며 얼른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뿔싸. 생 선지가 든 봉지가 차가 흔들리면서 조금 눕혀졌는지 차 바닥에 새서 시뻘건 피 같은 물들이 조금 고여 있었다. 나는 나 혼자 치우겠다고 했지만 남편은 괜찮다며 같이 치우자고 했고 뒷수습을 열심히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우거지를 넣고 얼큰하게 선짓국을 끓였고 남편은 하나도 못 먹었다는 사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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