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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상샬롬 Nov 21. 2020

딸과 집에 못 들어갈뻔하다

이런저런 이야기 58

  5년 전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일찍 출근하고 5살이었던 딸과 나는 아침밥을 먹고 함께 쓰레기를 버리러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다녀왔다.


  쓰레기를 다 버린 후 1층 현관의 비번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 집 현관문 앞에 도착해서 비번을 누르려는데 비번이 생각이 안 난다. 헉. 갑자기 왜 이러지? 진짜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것처럼 비밀번호 숫자 네개가 떠오르질 않는 것이다. 어색하게 웃으며 딸아이에게

"엄마가 갑자기 번호가 생각이 안 나네. 잠깐만."

이라고 말하면서도 민망하고 창피했다.


  5분 정도를 이렇게 눌러보고 저렇게 눌러봐도 다 틀린 번호다. 와 진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2년 동안 쓴 비밀번호가 왜 생각이 안 나는 건지. 갑자기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안 되겠다 싶어 창피하지만 남편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뿔싸. 핸드폰이 없다. 그날따라 왜 핸드폰도 집에 두고 온 것이냐.


  옆집에 부탁해서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해야 하나.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으니 공중전화도 못쓰겠고. 어떡해야 하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가 경비실이 생각났다. 그래, 경비실에 가서 전화기 좀 빌려야겠다.


  딸과 함께 경비실로 향했다. 경비 아저씨

에게 다른 때보다 더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왔는데 급하게 전화할 데가 있어서 좀 빌려 써도 되는지 물어보니 흔쾌히 경비실에 있는 전화기를 쓰라고 하신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야."

"어. 이 번호는 뭐야? 어디서 거는 거야?"

"아파트 경비실 번호야. 저기.... 여보.

근데 우리 집 비번 좀 알려줘."(일부러 목소리를 작게 내었는데 내 말을 옆에서 들은 경비아저씨 표정이 이상했다)

"뭐? 무슨 비번? "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못 들어가고 있어."(경비아저씨 표정이 살짝 웃으시는 거 같다)

"당신 장난이지? 0000이잖아. 갑자기 왜 그래?"

"아 맞다. 내가 왜 그랬지? 일단 알았어. 끊어."


  경비아저씨께 진짜 감사하다는 말씀을 거듭 드리고 나는 너무나 창피해서 딸과 함께 후다닥 집으로 왔다.


  얼마나 이상한 여자로 보셨을까? 자기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리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는 여자를 말이다.


  정말 나 자신이 너무 싫었고 화가 났고 무섭기도 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깜빡하며 잊어버릴 수가 있나 하고 말이다. 이러다 치매가 빨리 오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 며칠 동안 이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도 아주 가끔씩 냉장고 앞에 가서 '내가 뭘 가지러 왔지?'하고 깜빡할 때가 있다.


  하, 벌써 마흔 중반에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큰일이다. 딸이 푸는 수학 문제집을 얻어다가 내가 풀어야겠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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