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정리를 하다 국제 편지 몇 장을 발견했다. 반듯한 글씨로 쓴 편지봉투. 봉투를 열어보니 빽빽하게 쓴 두장의 편지지와 사진 한 장이 나온다. 아, 그때 편지구나.
20대 초반, 지역교회 선교단체에서 동갑내기들끼리 친해져 만들어진 모임이 있었다. 20명 정도 남여 동갑들끼리 모여 선교에 대한 정보도 공유하고 서로 고민도 털어놓고 맛집도 가보고 하며 자주 만나 어울리며 친해졌다.
그러다가 그 안에서 잘 통하는 친구들 열명 정도가 모여 2박 3일 국내 선교여행도 계획해서 다녀오기까지 했다. 회비를 걷고 지역과 장소를 정하는 등 신나게 준비를 했다. 그중 두 세명의 남자 친구들이 운전면허증이 있어서 봉고차를 렌트하고 번갈아 운전하고
개척교회로 선교활동을 도우며 다녔는데 정말 뜻깊고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그 친구들 중 sh라는 남자 친구와 특히 친해졌는데 그 친구가 운전을 제일 잘했다. 그래서 2박 3일 동안 운전을 제일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sh가 운전을 할 때마다 내가 보조석에 앉게 되었다. sh도 내가 옆에 있어야 잠도 안 오고 재미있다며 좋아라 했다.
그 당시 나는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열심히 활동 중이라 그 모임에서도 몇 번씩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했고 성격이 쾌활하고 활달하며 천성이 털털한 편이라 남녀 모두에게 나름 인기가 있었다. 후훗.
그리고 sh라는 친구도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준수한 얼굴에 똑똑하고 성격 좋고 자상한 편이라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 아마 키도 컸으면 아마 그 모임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 흐흐
암튼 보조석에 앉아서 sh가 운전할 때마다 졸음도 오지 않게 말동무도 되어주고 간식도 입에 넣어주는 등 옆에서 좀 챙겨주었다.
2박 3일의 선교가 끝나고 돌아오는 마지막 날은 sh가 하두 운전을 많이 해서 피곤할 테니 다른 친구들이 운전한다며 쉬라고 하자 sh가 눈 좀 붙이겠다며 잠이 들었는데 내가 또 그때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내가 sh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sh는 한쪽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나를 감싸듯이 자고 있었다. 근데 그 느낌이 나쁘지가 않아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이 들기도 해서 괜히 찔리듯이 주변을 보니 다행히 운전하는 친구 빼고 다른 친구들은 다들 잠이 들어 있었다.
선교여행이 끝나고 sh와 나는 더 급속하게 친해졌고 둘이 통화하고 만나는 시간도 많아졌다. 내가 다니던 회사 앞으로 찾아와 점심도 같이 먹고, 어떤 날은 이쁜 까페도 가고, 영화도 보러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sh는 특기였던 태권도로 아이들을 위한 지방 선교를 일주일간 간다며 나보고 기차역에 나와 배웅을 해달라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sh는 인사하자며 벤치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oo아, 나 너 좋아해. 너랑 사귀고 싶어. 나 일주일간 선교활동 잘 다녀올게. 그동안 잘 생각해보고 답변해줘. 기다릴게." 하더니 뛰어갔다.
잠시 후 기차가 출발했다. sh는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바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했다.
"예스, 내 대답이야."
사실 그 당시 나는 연하나 동갑이랑은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냥 다 어려 보이고 친구 이상의 감정이 들지 않았던 이유였는데 sh는 그래도 '사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 첫 남자였기 때문에 바로 대답을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몇 달 동안 사귀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sh가 태권도로 태국 단기선교를 가게 되었다. 준비하고 기다리던 일이었는데 일정이 빨라진 것이었다.
입국 전날이 다가왔고 sh는 저녁을 먹고 한강에 가자며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리고는 커플반지를 꺼내 내손에 끼워주더니
"나 너 많이 좋아해. 근데 2년 동안 선교 다녀올 때까지 나를 기다려달라고 이기적으로 말은 못 하겠어. 그렇지만 2년 후에도 네가 사귀는 사람 없이 혼자이면 우리 사귀는 거야. 알았지?"
나는 커플반지를 받을 수 없다고 했고 sh는 꼭 받으라고, 끼고 있으면서 자기 생각을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절대 부담은 갖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까지 매너 있는 남자라니. 참 감동을 많이 받았다. 그렇게 sh는 선교를 떠났고 나는 1년 후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교제를 했다. 서랍 속에 있던 편지는 그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 중 몇 개였는데 그게 정리 중 발견된 것이었다.
그 친구도 몇 년 후 그 모임에 있던 여자 친구와 교제하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나중에 사귀고 알게 된 사실. 차 안에서 보조석에 나를 앉게 해달라고 다른 친구들에게 부탁했단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