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업무가 글쓰기에 도움이 될 줄이야
나는 내가 책과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 버린 비운의 공대생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과학적, 공학적 지식을 글쓰기에 자연스럽게 녹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내가 책과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 버린 배경에는
많은 수포자를 배출한 악명 높은 수학, 이해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는 물리화학과 같은 이과 과목들과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맞지 않으면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공학이
나에겐 그렇게 최악인 학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성적에 대한 부담만 제외한다면 즐겁기까지 했다.
내가 딱히 선호해서 택한 건 아닌 길들이 그다지 어려움이 아니었기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고, 나의 진짜 욕구를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책과 글쓰기에 관심을 가졌냐 하면, 때는 전 세계적인 팬데믹 시기였다.
오랜 학업과 입시를 마치고 성인이 되어 처음 접하는 음주 문화에
눈코 뜰 새 없이 동기들과 어울리며 간이 보내는 눈물겨운 아우성은 웃음소리에 묻어 버리던 차
갑작스러운 팬데믹은 그 모든 유흥들을 순식간에 단절시켰다.
마치 한가롭게 바다에서 휴양을 즐기던 중 엄청난 파도에 휩쓸려 한참을 소용돌이치다가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인도에 안착한 듯한 그런 느낌.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책은 나에게 탐나는 습관 중 하나였다.
꾸준히만 한다면 여러모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습관일 것 같은데
꾸준히 시도해 보았으나 늘 큰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작심 N일이 되곤 했다.
그러나 일을 하는 지금에도 월에 2~3권씩은 꾸준히 책을 읽게 된 것을 보면
초반에 흥미를 담지 못하는 일이더라도 종국에는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나 있는가 보다.
그렇게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2020년, 내가 대학교 3학년에 들어갈 무렵
일상생활을 빼앗긴 나는 나의 새로운 일상생활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가 바로 책이었다.
어떻게 해도 꾸준히 하지 못하던 그것을 나의 모든 흥미를 눌러 담아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간 어떻게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책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였다.
지금처럼 바쁘지도 않던 그때는 일주일에 2~3권씩도 읽곤 했었다.
책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독후감으로 쓰고,
쓰다 보니 나만의 새로운 표현으로 그것을 담아내는 데 욕심이 생기고,
그렇게 글쓰기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때 나는 생각이든, 감정이든, 현상이든 무언가를 글로 표현해 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다.
취준이 싫고, 취업이 무서워 도피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나 싶은 의심도 드는데
뭐 그것도 일말의 여지도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글쓰기에 진심이 되고, 그것에 대한 깊은 사랑의 시작이었음은 분명하다.
그것에 닿는 법을 모른 채 작가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하면서도
공대의 전공을 살려 취업 준비를 시작했고, 취준 1년 차에 입사에 성공했다.
적당히 전공을 살려 적당히 그럴듯한 기업에 취업을 하는 사람들 중
그 일에 사명을 갖고 일을 통해 인생의 목표를 실현할 테야라고 다짐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입사를 할 때부터 나는 회사를 적당한 재정지원처 정도로 생각하고
워라밸을 확보하여 퇴근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쓸 다짐을 한 것이다.
그렇게 글을 쓰는 공학도의 제조업 직장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글을 쓰는 데 나의 이런 상황이 많은 제약과 역설적이게도 많은 재료를 주고 있으며
여러 종류의 재료들 중 '업무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환경안전 업무를 하면서 보고서를 쓸 일이 정말 많다.
산업안전보건법 제0조, 고용노동부 고시 제0조 등 법률에 의거한 업무들은
그러한 수행 이력에 대한 증빙 이력을 내부 보고를 통해 보관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법적인 업무들도 당연히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특히나 사기업의 환경안전은 조금 더 보고 업무에 특화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환경안전 업무의 성과가 뚜렷한 지표로 나타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제조나 기술, 개발과 같은 부서는 생산율, 수율, 품질 등
개선이나 성과에 대한 지표가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하지만
환경안전은 사실 아무 일도 없는 것이 가장 큰 성과다.
그렇다면 경쟁이 치열한 사기업인 이곳에서 환경안전 실무자들의 성과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그렇기에 환경안전에서 보고 업무가 중요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업무와 더불어 어떤 것을 추가로 개선하였는지
냉정하게 말해서 별 볼 일 없는 일도 별 볼 일 있게 만들어내는 역량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것들을 표현하는 개인의 역량과 성향이 그들의 보고서에 여실히 드러난다.
누군가는 잡다하게 맡고 있는 업무나 크게 하는 일 없이도
번지르르한 보고서만 종종 올리며 본인의 성과를 어필하는 한 편,
누군가는 누구보다 열심히 현장을 뛰고, 현장의 소리를 듣고 업무 효율화를 이룬다 해도
보고를 잘할 줄 몰라서, 혹은 원치 않아서, 혹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에게 빼앗겨서 본인의 성과를 어필하지 못하곤 한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편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도 하고, 일이 바빠서 거기까지 신경을 쏟고 싶지가 않다.
지금이야 신입이라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니 리더들이 챙겨서 보고서 작성에 도움을 주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계속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잡일만 하며 도태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긴 하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내 성과를 부각하기 위한 보고서를 쓰고 있는 지금
어떤 부분을 강조해야 하고(내용),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하는지(형식) 고민하는 과정에서
표현의 한 형태인 글쓰기를 추구하는 내 성향이 빛을 발하기도, 도움을 받기도 하는 형국이다.
업무적으로 크게 부담이 아닌 시기에 하는 그런 고민들은
그 고민에서 오는 고통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전에는 물론 바쁘기도 하고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다 보니
명백한 업무의 한 형태인 그것을 닫힌 시각에서 바라보았기에 긍정적인 면을 보지 못한 것인지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만 제외하면 지금까지 봐 온 내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히 내가 흥미를 느낄 만한 행위이고, 내 취미에 도움을 줄 만한 업무이다.
아무리 내가 하고 싶은 것과 관련 없는 업무를 하고 있다고 해서
굳이 내가 조금이나마 흥미를 느낄 수도, 나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들까지
마음의 문을 두드리지 못하도록 굳세게 닫아놓을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여유가 있을 때나 그것도 가능하겠지만)
어떤 것을 바라보고 해석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는 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