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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잎지던날 Mar 14. 2017

많아도 부족하게만 느끼는 것


우리 집은 물질적으로 넉넉한 집은 아니었다.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는 무책임했고, 무능했다. 하지만 내게는 누구보다 성실했던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가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내가 어디 가서 아주 없이 살았다, 말하지 않는 것도 다 엄마의 노력 덕분이었다. 


사정 아닌 사정이 있다 보니 어릴 때 주기적으로 용돈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대신 그때그때 필요한 액수를 받거나 엄마가 직접 물건을 사다주시고는 했다. 

버스를 타야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후불제 교통카드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직접적으로 돈 쓸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애당초 돈 쓸 일이 없었기에 부족함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집안 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작은 월급이나마 받아 오던 아버지는 집에서 놀기 일쑤였고 종종 일 할 때도 임금을 떼여 한 달에 이삼십만 원 가져다주는 것이 전부였다. 집안을 꾸려나가는 건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는 공장에서 일을 하셨다. 새벽같이 출근해 야근을 하고 나면 늦은 밤이 돼서야 퇴근하셨다. 바쁠 때면 쉬는 날도 없이 몇 달이고 일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해도 엄마의 월급은 백만 원이 조금 넘었다. 어려서 내가 돈 걱정이나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건 그런 엄마의 각고의 노력 때문이었으리라. 내색은 않으셨지만 내가 돈을 달라고 할 때마다 엄마는 없는 생활비를 쪼개고 또 쪼갰을 것이다. 자식새끼 돈 걱정 안 시키기 위해.

그러나 그런 엄마의 부단한 노력에도 내가 돈에 대한 설움이나 무서움을 알게 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고 난 재수를 하게 됐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재수라니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에 알아서 하겠다 말해놓고 조금 모아 놓은 돈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재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재수는 알바를 하면서 할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고 피곤에 지친 몸을 책상에 앉히니 공부보다는 졸기 바빴다. 머잖아 알바를 그만두게 됐다. 


해본 이는 알겠지만 재수라는 게 생각보다 자질구레한 돈이 많이 든다. 참고서도 사야 했고 독서실도 다녀야 했으며 밥도 먹어야 했다. 학원은 꿈도 못 꿨고 모아 놓은 돈은 여름이 되기 전에 바닥났다. 

독서실 비용을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동네 자치센터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공부방으로 옮겼다. 밥은 같이 공부하던 친구에게 주로 얻어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녀석도 부족하고 힘들었을 텐데 많이 고맙고, 미안하다. 

친구가 없는 날에는 삶아간 달걀을 먹거나 여의치 않을 땐 그냥 굶었다. 생애 처음으로 돈이 없어 굶은 것이다. 고작 몇 천원에 사람이 비참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하찮은 종이 쪼가리가 세상 무엇보다 더럽게 느껴졌다. 엄마가 말없이 느꼈을 참담함도 함께.


나이를 먹고 직장에 다니면 돈 걱정은 안 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서른이 넘은 지금도 난 여전히 돈 걱정을 한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내 부모자식도 아닌 게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이제는 조금은 의연해지려 한다. 삶에 밀접한 것에 대해 의연한 자세를 갖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나와 같은 걱정을 하며 살아간다. 그 점을 위안 삼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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