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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잎지던날 Mar 21. 2017

상비약


우리 집엔 항상 구비되어 있는 상비약이 있다. 자그마한 병에 액상으로 들어있는 ‘판토’라는 감기약과 피로회복제인 ‘바카스’다.

판토는 엄마가 단스라 불렀던 서랍장에 항상 구비해 뒀는데 심부름으로 약국에 가면 약사님이 말도 꺼내기 전에 판토를 내줄 정도였다. 집안 살림에 전혀 관심이 없던 아버지도 판토 만큼은 떨어트리는 일 없었으니 우리 집에서는 나름 없어서는 안 될 물건 중 하나였다.


이 이름도 생소한 판토가 우리 집에서만 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형제인 큰아버지 집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큰아버지에게 세배를 올리다 텔레비전 옆에 놓인 판토를 발견하고 꽤나 놀라워했다. 

우리 집에만 있는 줄 알았던 판토가 큰집에도 있다는 사실에 크게 동질감을 느낀 나는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여기에도 판토가 있어!”라고 소리쳤다. 엄마는 흥분한 나를 달래며 판토는 엄마가 시집오기 전부터 있었다고 설명했다. 엄마의 시어머니 즉, 나의 할머니께서 자주 드셨던 약이었고 당시에도 떨어트리는 법이 없었다고.

판토가 비록 감기약이기는 하나 우리 집에서는 만능 약으로 통하는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두통이 있거나 몸살 기운을 보이면 엄마는 우선 판토부터 마시라고 하신다. 기침을 해도 열이 나도 판토였고, 피곤한 모습을 보이면 “판토 하나 먹고 푹자!”라고 하시니 만능 약도 이런 만능 약이 또 있을까 싶다.

왜 하고 많은 약들 중에 판토였을까.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여쭤봤겠지만 안 계신 지금에야 출처가 불분명한 전통음식처럼 그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겠지, 하고 추측만 할 뿐이다.


또 하나의 상비약인 박카스가 우리 집에 상주하기 시작한 건 아마도 전역하고 복학할 때쯤인 것 같다. 엄마는 노년에 가까운 나이셨지만 집안의 실직적인 가장이었기에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내가 자리 잡기까지는 몇 년이 될지 모를 일이었고, 아버지는 나이를 먹었다는 핑계로 더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

힘든 일을 마친 노동자가 한 잔 술로 피로를 잊듯 술을 못 드시는 엄마는 박카스로 고단한 노동을 잊었다. 박카스가 술의 신이니 엄마에게 박카스는 술인 셈이었다.

덕분에 나도 엄마의 박카스를 종종 훔쳐 먹고는 했다. 피로 회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맛으로 먹었다. 요즘엔 다양한 드링크 제품이 많아 굳이 박카스를 마실 일 없지만 엄마는 박카스만 한 게 없다며 박카스만을 고집하셨다.


어느덧 엄마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셨다. 한 해만 더, 한 해만 더 하셨지만 이제는 박카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피로감과 본인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늙은 몸을 탓하며 오랫동안 다녔던 직장을 그만두셨다. 엄마의 퇴직으로 더 이상 찾는 이 없어진 박카스도 자연스레 집에서 사라졌다. 

박카스는 엄마의 고단한 노동의 산물이었다. 박카스가 집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더 이상 엄마가 힘든 노동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지 그 빈자리는 지독히도 고독했던 가장 노릇에 망가져 버린 몸을 지탱할 약들이 채워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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