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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잎지던날 Jul 16. 2017

익숙함의 또 다른 말

어릴 적 친하게 지내온 친구 녀석이 술집을 하나 차렸다. 녀석은 일손이 달린다며 잠시 주방 일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고 난 흔쾌히 승낙했다.


그곳에서 내가 주로 맡은 일은 설거지였다. 규모가 큰 가게는 아니라서 식기세척기가 따로 있지 않았다. 그래서 설거지를 하려면 고스란히 사람 손을 거쳐야 했고 바쁜 날이면 온종일 싱크대에 붙어있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설거지는 힘들다. 게다가 싱크대가 낮아 설거지를 하려면 자연스레 허리가 구부정해졌다. 불편한 자세로 장시간 설거지를 하고 나니 집에서는 나도 모르게 기어서 다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허리를 꼿꼿이 세우자니 옷이 젖기 일쑤였고, 무거운 철판들이 많아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전혀 괜찮아지지 않을 것 같은 설거지도 시간이 지나자 차츰 요령이 생겼다. 한참을 구부정하게 있어도 견딜만했고 설거지 양이 많아도 기어 다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가 마음 편할 때도 있었다. 설거지에 익숙해진 것이다. 


익숙함은 지금 처한 상황이나 환경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사람에 대한 익숙함도 존재한다. 홀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세 살이 어렸고 알바를 하면서 알게 된 사이었다. 

처음에는 서로가 잘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어리다고 함부로 부리지 않았고 부득이시킬 일이 있다면 정중히 부탁했다. 그 아이도 공손하게 부탁을 들어줬고, 할 일이 있다면 먼저 나서 도와주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 나는 그 아이에게, 그 아이는 내게 익숙해졌다.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그 아이를 시키게 됐고, 말투는 어느새 명령조로 바뀌었다. 그 아이도 내게 가끔 짜증을 내기도 했고, 정색하기도 했다. 익숙해져 소홀해진 것이다. 


사장인 친구도 익숙해졌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관계였다. 지금은 같이 일하는 동료였다. 동료로서 우리는 익숙해졌고, 역시나 소홀해졌다. 

친구는 가게를 비우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그럴수록 내가 일하는 날은 점점 늘어났고 어느새 대신 일하는 게 자연스럽게 됐다. 나는 친구의 가게라고 조금씩 늦는 것이 태반이었고, 친구를 대할 때 까칠함이 가득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익숙해진 만큼 소홀해졌다.


이제는 가게도 문을 닫아 다시 친구의 관계로 돌아갔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조금은 서운함이 멤 돈다. 그건 내 친구도, 그 아이도 마찬가지리라. 

어쩌면 익숙해진다의 또 다른 말은 소홀해진다 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은 소홀함을 부른다. 그리고 그 소홀함은 가까운 이마저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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