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10일간의 휴가를 받았다. 구정 연휴까지 포함하면 2주나 되는 시간이다. 휴가 날이 다가올수록 동료들은 바쁘게 여행 계획을 세웠다. 가까이 있는 목포부터 멀리 일본까지. 그들이 차곡차곡 성실히 휴가 계획을 세울 동안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전라도 광주에 있는 친구에게 다녀올까 싶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 휴가날짜에 맞춰 외국으로 출장을 가버렸다. 역시 어설프게 짠 계획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난 아무런 계획도 못 세우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 무계획도 계획이라며 여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꿈꿨다.
느지막이 일어나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가벼운 점심식사 후 못 본 영화도 보고 글도 쓰며 나름의 우아한 시간을 보낸다. 시간이 되면 산책도 하리라. 상상 속 내 모습은 드라마 주인공처럼 근사했다.
그러나 휴가 첫날이 되고 난 그냥 백수가 됐다. 늦게 일어나니 입이 텁텁해 커피 마실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여유롭게 영화, 독서, 글쓰기는 개뿔, 베개에 머리만 갖다 대면 잠들기 바빴다. 일어났다 자고. 밥 먹고 자고, 자고 또 자고. 현실에 있는 시간보다 꿈속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다 밤이 되면 친구 전화에 겨우 일어나 술을 마셨다.
아무것도 못한 채 허무히 휴가 첫날을 보냈지만 이튿날도 상황은 비슷했다. 술을 마셨으니 첫날보다 더 늦게 일어났고, 늦게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시간을 죽였다. 할 일 없이 인터넷이나 서성거리다 밤이 됐고 약속이 없어 영화를 보며 가볍게 혼술을 했다. 그렇게 이튿날이 지나갔다.
셋째, 넷째 날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어느새 덥수룩 자란 수염과 떡진 머리의 조합으로 드라마 주인공보다는 주인공 백수 삼촌에 어울리는 모습이 됐다는 것 정도.
그런데 문득 이 생활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기시감이 아니었다. 내가 휴가 동안 하고 있던 짓은 이십 대 백수 시절과 똑같은 생활이었다. 요즘 아이들 말로 존똑. 서른이 넘어도 한참 넘은 나이였지만 이십 대 하던 짓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결국 난 금요일이 되도록 한 게 아무것도 없다.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많이 피곤했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는 거야, 라고 합리화해보지만 그냥 놀고먹은 거다.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마 남은 휴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천성이 백수라 이번 생, 우아하게 살 긴 다 틀린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