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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잎지던날 Mar 15. 2018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료조사 때문에 헌책 하나를 구입한 적 있다. 대중적인 책이 아니어서 오랜 시간 수소문 끝에 구한 책이었다. 책은 헌책답게 많이 낡아 있었다. 손을 많이 탄 것 같진 않지만 빛바랜 흔적이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 있었던 모양이다. 

표지를 넘기자 짤막한 편지가 적혀있었다.      


  매형께 드립니다.

  2004년 8월 

  저자 드림     


의아했다. 나는 분명 이 책을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그렇다는 건 이 책을 팔았다는 것인데 어찌 선물 받은 책을 팔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것도 저자인 처남이 매형에게 직접 선물한 책을.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한낱 책 한 권일지 모르지만 어쩐지 선물한 이의 마음까지 버려진 것 같아 내가 다 서운했다.      

예전에도 도올 김용옥 선생이 H국회의원에게 선물한 책이 헌책방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그때도 난 굉장히 분개했다. 자신에게 보낸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국정의 대소사를 논하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계신 엄마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한 뒤 흉을 보기 시작했다.      

  “엄마, 진짜 너무하지 않아? 어떻게 선물한 책을 헌책방에 팔아넘길 수가 있지? 그것도 저자가 처남인데. 아마 인간이 덜 된 사람일 거야. 그치?”     


난 엄마의 동의를 구했다. 평소 예의를 중요시하는 엄마라면 분명 내게 동의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툭 던지듯 말했다.      


  “돌아가셨나 보지.”     


누가 내 뒤통수를 세게 후려 친 것 같았다. 안일하고 편협한 생각. 죽은 사람의 물건은 정리되는 게 맞는데 어찌 버렸다고만 생각했을까. 그들의 사정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백수 시절 일이다. 자주 가던 커뮤니티에서 급하게 B형 백혈구 헌혈이 필요하다는 글 하나가 올라왔다. 난 글 마지막에 적힌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게시판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B형이고 남자입니다.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잠시 후 답신이 왔다. 연락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검사받은 뒤 적합 판정이 나면 두어 번 더 병원에 와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곧바로 답문을 보냈다.      


  [네. 알겠습니다. 급하면 지금이라도 가겠습니다.]     


그러나 다음 회신은 다음 날이 돼서야 받을 수 있었다.      


  [늦게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급한 상황은 피했습니다. 혹시 다음 주라도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급한 상황은 피했다는 말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전날 연락되지 않아 답답함과 가슴 한편 서운했던 마음도 사라졌다.      


   [네. 다음 주라도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다음 연락은 5일이 지나서 왔다. 통화 가능할 때 전화 달라는 문자였다. 전화를 걸자 젊은 여자가 받았다. 다음날 세브란스 병원에서 검사받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나는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준비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병원으로 가는 버스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열었다. 그리고 세브란스 병원을 검색하고 나서 깨달았다. 세브란스 병원이 강남과 신촌, 두 개가 있다는 사실을. 물론 난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일단 집에서 나왔다. 약속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출발해야 했다. 병원은 가는 동안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도록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서울로 가는 버스는 3대가 지나갔고 돕고 싶었던 마음은 삽시간에 짜증으로 변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나와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술이나 한잔할까?”     


서울로 가는 버스 대신 동네 익숙한 술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며칠 뒤 한가로이 책을 보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으레 오는 스팸전화라 생각했지만 지역번호가 아닌 게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저번에 수혈 때문에 통화했던 사람인데요.”     


수혈이라는 단어에 기억 저편 잊고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나의 성의가 무시됐던. 나는 그 일이 있던 날 한 잔 술과 함께 서운함도, 괘씸함도 모두 잊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래 마음 둘 일도 아니었다. 버스에 탔다면 헛걸음 했다는 생각에 마음에 담아뒀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빨리 연락되지 않아 오히려 친구와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연락받지 못해 미안하다며 사과부터 해왔다.      


  “헛걸음 하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사과를 받으니 한 번 더 기분이 풀어졌다. 옹졸하게도 이제야 너그러운 마음도 생겼다. 집에 환자가 있으니 정신없어 그럴 수도 있다며 없던 아량도 생겼다. 나의 성의가 무시당하지 않은 거 같아 우쭐하기도 했다. 그녀의 다음 말을 듣기 전 까지는.      


  “그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연락을 미처 못 드렸어요.”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죄송합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한 사람의 죽음 앞에 고작 한다는 말이 죄송합니다라니.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이미 백지였다. 그렇게 책을 읽고 또 읽었으면서 위로와 어울리는 단어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난생처음 겪는 일에 마주한 서른 살 짜리는 그저 사과만 했다. 무엇을 잘 못했는지도 모른 체.

그녀는 마지막으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난 결국 죄송하다는 말 외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왜 그리도 멋대로 생각했을까. 조금, 조금만 더 너그러웠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회한과 함께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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