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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Jul 12. 2021

<동화 에세이> 왜 자식을 낳았는가?

동화 '페인트'를 읽고



아이는 부모의 필요에 의해 태어난 존재 같아요.(p.76)   

  


우리 부부는 아이를 원했다. 결혼하고 6개월쯤 있다가 아이가 생겼고, 부모가 된다는 사실에 들떴다. 6개월이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아이가 생긴 것인데도 그 시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 있었다. 아기를 좋아했고,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진 입덧과 무지막지한 진통 속에 태어난 아이는 남들이 말하는 순한 아이였다. 남들이 말하기로는 평균 이상으로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아이였지만, 나에게는 전혀 순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번도 안 순한 아이를 낳아서 키워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자랐는지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아이를 낳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기 때부터 자라온 과정을 기억할 수 있다면 감히 아기를 낳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혼자 잘 나서 쑥쑥 자란 것처럼 여겼던 교만에 대해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신생아가 그렇게 자주 잠을 깬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엄마가 한 번씩 말씀하신 것이 언뜻 스쳐간다. 

“너는 잠귀가 얼마나 밝은지 30분을 연달아 자는 일이 없었다. 겨우 재워서 눕혀 놓고 돌아서면 귀신같이 알고 울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엄마의 푸념이 그제야 기억났다. 내 아이는 두세 시간은 통잠을 자곤 했지만, 나는 하루 종일 아이와 내 발을 족쇄로 묶어 놓은 듯 아이한테 헤어 나오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밥을 먹을 때나 화장실에 가는 일을 그토록 마음먹고 타이밍을 맞춰서 해야 할 일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다. 혼자서 아이를 보는 초보 엄마에게는 모든 일이 벅차고 지치기만 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할 겨를 없이 온통 아이에게만 정성을 쏟는 그 시간 속에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 늘 초조했다. 


첫 아이를 키우며 이제 둘째 아이는 절대로 못 낳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다시 거치는 일이 두렵기만 했다. 나는 첫째 아이를 어린이 집에 보내면서 조금 살만해지자 둘째를 가졌고 결국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물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데에는 누구의 강요도 없었다. 시부모님이나 친정 부모님도 둘은 되어야 한다고 은근한 압력을 넣으셨지만, 나는 그 정도의 압력을 강요로 느낄 만큼 효심 깊은 사람은 아니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백 퍼센트 내가 낳고 싶어서 둘을 낳았다.   

   

내가 원해서 낳았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내가 기대했던 삶은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육아 초반에 가장 힘든 점은 육체적으로 힘들고 지친다는 것이다. 아이는 3킬로그램 전후로 태어나지만, 10킬로가 넘을 때까지 걷지를 못하니 1년 동안 매일 10킬로의 쌀포대를 수십 번 들었다 놨다 해야 하는 셈이다. 이유 모를 땡깡이 동반되는 상황이면 몇 시간을 업고 안아야 한다. 그때는 정신적으로도 매우 지친다. 드라마나 먼발치에서 봤던 육아는 평화 그 자체였는데 아이를 안고 있는 내 몰골은 전쟁터에 서 있는 패잔병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군복이 아니라 수유 원피스를 입었다는 것만 달랐다.   

   

그래도 아이를 보면 행복했다. 아이는 나를 너무나 사랑해주기 때문이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엄마를 찾는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찐 사랑에 내 모성 본능도 깨어났다. 부모의 사랑은 바다보다 넓고, 하늘보다 높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기가 부모를 향해 내뿜는 사랑에 비하면 부모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없으면 울고, 내가 나타나면 웃는 아기를 보며 나도 내 속에 꼭꼭 숨겨뒀던 사랑을 꺼냈다. 남편에 대한 사랑, 부모에 대한 사랑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이만큼 맹목적으로 목숨을 걸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이토록 사랑해 주는 아이를 위해 나도 내 목숨을 걸고 싶어 진다.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다. 내 아기.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 아기'는 나를 목숨을 다해 사랑했다는 사실을 곧 잊고 만다. 내 사랑은 이제 막 깨어난 듯한데 내 아기의 나에 대한 사랑은 3년이 유통기한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내 사랑을 부담스러워한다. 아이를 사랑해서 밥을 억지로 먹이고, 하기 싫다는 공부도 억지로 시키고, 관심 없는 박물관도 강제로 데려간다. 유기농 재료로 정성껏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지 않는다며 화를 내고, 비싼 학원을 가기 싫어한다고 분노하고, 박물관의 비슷비슷한 도자기들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며 아이를 구박했다. 일방적인 내 사랑은 욕심으로 변질되고 남루해진다.      


내가 좋아서 낳고, 내가 좋아서 키우면서 아이에게 너도 좋아해야만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모든 것이 너를 위한 일이라며 커보면 너도 좋아하게 될 거라고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고 미래만 들여다보기를 아이에게 강요한다. 나도 내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아이에게는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아이가 태어나서 온 몸을 다 바쳐 나에게 주었던 사랑을 잊지 못하고 아이를 향한 짝사랑은 깊어만 간다. 그런 게 사랑이라면 아이는 그만하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만 두지 못한다. 나를 향해 이 없는 잇몸을 드러내고 활짝 웃었던 때로 다시 돌아가서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아이는 묻는다. 왜 낳았냐고,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이 무조건적인 사랑인지, 부모의 만족을 위한 수단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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