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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Jul 16. 2021

<동화 에세이> 다시 생각나는 날들

황선미 '일기 감추는날'을읽고



일기 쓰기 숙제는 언제나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매일 같은 하루인데, 선생님은 하루 중 일어난 일 중 특별한 일을 떠올려 자세히 쓰라고 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반성까지 해야 하고 일기의 양도 많으면 많을수록 잘 쓴 일기로 평가받는다. 


나는 그 기준에 꽤 잘 맞는 일기를 써내서 선생님의 칭찬도 받고, 일기상을 받기도 했다. 지금 떠올려 보면 그 순간들이 왜 이렇게 낯간지러운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어른의 마음에 들고 싶은 어린이였을 뿐 솔직한 일기를 쓴 것은 아니었다. 

칭찬 때문에, 상장 때문에 쓴 일기장이 나는 어느 순간 꼴도 보기 싫어졌고,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너른 공터에 일기장을 싸들고 나가 모두 불태워 버렸다. 

어른이 된 나는,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잊어버린 듯이 내 아이들에게 또 똑같이 어릴 적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일기의 조건을 강요하고 있다. 






황선미 작가의 <일기 감추는 날>은 초등학교 3학년인 동민이가 주인공인 동화이다. 두께도 얇고 글씨도 큰 동화라 읽는데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30여 년 전 일기를 쓰던, 그리고 일기장을 태웠던 나를 현재로 소환했다. 


 동민이의 담임 선생님은 일기 쓰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다. 


수연이랑 정우랑, 몇 명은 칭찬할 만해. 그런데 다른 사람은 일기를 성실하게 쓰지 않는구나.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단 말이야. 적어도 공책을 가득 메울 쓰도록 해.(p.15)


 선생님은 일기를 쓰는 성실성의 기준을 ‘반성’과 ‘일기장에 적힌 글씨의 양’으로 평가한다. 다른 친구한테 괴롭힘을 당한 억울한 이야기는 다른 친구 이야기라서 적합하지 않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반성’이 일기의 주요 주제여야 하는 선생님에게는 동민이가 힘겹게 꺼내 쓴 고백도 꾸지람의 대상일 뿐이다. 

동민이의 부모님은 지금 힘든 상황이다. 아빠가 실직을 한 듯하다. 엄마와 아빠의 분위기는 냉랭하고, 엄마는 동민이 몰래 자주 운다. 이런 일기는 엄마가 싫어하신다.


어제 일기 지우고 다시 써. 엄마랑 아빠가 싸운 건 안 돼. 다른 걸로 써. (p.52)


급기야 동민이는 '이 세상에서 일기가 사라졌으면 좋겠다’(p.55)고 생각한다. 


 5월 23일 금요일 흐림

엄마가 운다.

화장실에서 몰래 운다.

나도 울고 싶다.(p.58)


 동민이가 쓴 단 세 줄의 일기는 선생님에게 차마 보여 줄 수 없다. 반성을 하지도 않았고, 일기의 양도 너무 적고, 엄마가 싫어할게 분명한 일기장을 내지 않고, 동민이는 차라리 벌 청소를 하기를 택한다. 


며칠 동안 일기는 못 씁니다. 왜냐하면 비밀이거든요. 

조금만 말씀드리자면, 엄마가 아직도 슬프기 때문이에요. 

이런 건 일기가 아니다 하시면 계속 계속 문 잠그는 아이가 될게요.(p. 73)


동민이는 엄마와 선생님이 원하는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 것 같다. 


‘그래. 난 문 잠그는 애다. 벌 청소한다고 죽냐.

앞으로도 난 일기 감추고 싶은 날에는 청소하고 말 거야. 

일기장 두 개 따위는 만들지 않아.’ (p. 77)


옷이 긁혀도, 살이 긁혀도 학교 담장을 기어이 뛰어넘는 동민이의 성장이 눈부시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꿈도 없고, 그저 도둑놈이나 깡패가 되지 않는 것이 소원인 동민이의 특별한 재주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어른들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기꺼이 일기를 감추는 동민이의 행동이 뿌듯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동민이가 되어 그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황선미 작가의 힘 이리라. 작가는 ‘당신도 이럴 때가 있었잖아요. 다 알아요.’하면서 나를 초등학교 3학년 때로 데려다 놓는 듯하다. 

나도 동민이처럼 나 자신을 지키는 힘이 강한 아이였다면 그 일기장들을 태우지 않아도 됐을 텐데. 거짓말로 가득 찬 일기장을 두고두고 볼 용기는 없었지만, 성깔머리는 대단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일기장 탓인 듯 일기장에게 화풀이를 했던 나의 사춘기도 생각나고, 내 아이에게 일기 지도를 하는 내 모습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일기 감추는 날>은 수없이 ‘당했던’ 나의 일기장 검사를 동민이가 대신 통쾌하게 되갚아 준 듯하다.  

이제 나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진실한 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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