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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Jul 09. 2021

꽃무늬 팬티

마흔네 번째 생일 선물


마흔네 번째 생일이다. 만으로는 마흔셋이니 마흔세 번째 생일인가 보다. 요즘 내 집 마련 때문에 너무 머리가 아파 생일이 다가오는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생일 챙기기 좋아하는 우리 아이들이 종종 "엄마 생일 다 돼 가네."라고 말을 해서, ’아 이제 내 생일이 다돼 가나보다.'라고 생각했을 뿐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생각조차도 깊이 하지 못했다.


집 매매가 예상보다 너무나 머리가 아픈 상황이라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휴식과 기분전환이 필요하긴 했다. 하루라도 이 머리 아픈 상황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지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가서 하루만이라도 남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쉬고 싶었다. 남들은 자신에게 호캉스라는 특별 선물을 잘도 하사하던데, 나는 그럴만한 배짱은 없었다. 내 생일 선물로 혼자 호텔에 가서 자겠다고 하면 남편이나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다. 남편은 “나는?”이라고 물을 것이 뻔하고(자기 때문에 떠나고 싶은 줄은 모르고), 아이들은 엄마 혼자 가면 심심해서 안된다고 할 것이다.(제발 심심하고 싶어서 가는 것인데)     


나는 나의 가정 형편과 현재 상황을 고려해 나에게 주는 선물이 뭐가 좋을지를 고민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나에게 선물이 될만한 물건을 하나 사고 싶었다. 화장품도 떨어졌고, 옷도 없고, 신발도 없고. 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고르기가 힘들었다. 그때 마침 텔레비전 홈쇼핑에서 팬티 판매가 눈에 띄었다. 팬티는 빨강, 노랑, 주황 화려하기 짝이 없는 꽃무늬 팬티였다. 완전 내 취향을 저격하는 팬티였다. 나는 학생 시절부터 꽃무늬가 들어간 옷들을 좋아하고 즐겨 입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할매 취향’이라고 놀렸지만, 나는 그때도 지금도 꽃무늬가 좋다.


홈쇼핑의 꽃무의 팬티는 무려 18장에 39000원이었다. 한 장에 2000원이 조금 넘는 셈이다. 팬티는 나의 선물 리스트에 없었는데, 39000원어치 팬티를 사야 할 것인지 고민이 됐다. 지금 입고 있는 팬티는 벌써 산지가 5년은 됐다. 누구에게 보여 줄 일이 없는 팬티라 낡고 허름해도 열심히 입었다. 겉옷 살 돈도 없는데, 팬티까지 신경 써서 입을 여력이 안됐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이면 꽃무늬 팬티 두장을 사는데, 팬티보다 언제나 커피가 먼저였다. 낡은 팬티를 입고 스타벅스에 앉아서 커피맛도 모르면서 커피가 맛있다며 아는 척을 했다.


홈쇼핑 속의 쇼호스트가 팬티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것을 보며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살까, 말까’ 고민하며  꽃무늬 팬티를 쳐다보고 있었다. 과연 아름다웠다. 저 꽃무늬 팬티를 매일 입는다면 집 마련 때문에 우울했던 고민도 덜어질 것 같았다. 나는 과감하게 전화기의 주문 버튼을 눌렀다. 주문을 해놓고도 너무 과소비를 해 버린 게 아닌가 후회가 들기도 했다. 팬티 같은 거 그냥 막 입어도 아무도 모르는데, 괜한데 돈을 썼나 싶었다.


이틀 만에 팬티는 배송되었다. 상자를 여는 순간 열여덟 장의 꽃무늬 팬티가 펼쳐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팬티가 한꺼번에 내 손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팬티 부자가 되었다.  든든했다. 비닐에서 팬티 한 장을 꺼내 펼쳐보았다. 고무줄이 거의 배꼽까지 오는 맥시 스타일의 꽃무늬 팬티는 할머니의 고쟁이를 연상시키는 넉넉하다 못해 풍덩한 스타일이었다. 팬티가 너무 커서 내가 입으면 밀착되지 않고 속바지처럼 헐렁거릴 것 같았다. 괜히 이 많은 팬티를 샀나 싶었다. 반품을 하려다가 귀찮기도 하고, 택배비가 아깝기도 해서 어떻게 하나 고민이 되었다. 너무 크면 친정 엄마에게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장을 시험 삼아 입어보았다.



그런데, 입자마자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너무도 편했다. 게다가 딱 맞았다. 헐렁거리지 않고, 맞춤처럼 딱 맞았다. 마흔네 살이 되는 동안 내 몸은 할머니 고쟁이에 적합한 체형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변해버린 내 몸이 슬프면서도 팬티의 편안함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렇게 편한 팬티를 안 사고 나는 지금까지 어디다 돈을 써댔던 것인지 내 인생이 한심해서 눈물이 났다. 꽃무늬는 나의 볼록한 똥배까지도 할머니 손길처럼 편안하게 감쌌다. 나의 아랫도리를 옥죄던 옛날 팬티들을 옷장에서 꺼내어 바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낡기도 낡았지만, 사이즈가 맞지 않는 팬티들을 불편함을 참고 입어왔다는 것을 꽃무늬 팬티로 인해 알게 되었다. 꽃무늬 팬티로 인해 새로 태어난 기분마저 들었다. 고무줄이 배꼽까지 오는 꽃무늬 팬티를 입은 내 모습을 거울로 비춰보며 계속 웃었다. 꽃무늬 팬티는 꽤 괜찮은 생일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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