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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Dec 09. 2021

장례식에서

        

장례식에 다녀왔다. 딸 친구 엄마의 장례식이었다. 딸은 중2다.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싹싹하게 인사하던 그 아이의 엄마라니. 그 엄마는 나와 같은 나이인 마흔 넷이었다.


엄마를 잃은 친구 소식을 접한 딸은 오열하며 장례식장으로 바로 가겠다고 했다. 시험기간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오직 친구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의 일인 양 비통해했다. 나 역시 세 아이를 두고 황망히 세상을 떠난 고인의 소식에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눈물만 흘렀다. 딸을 겨우 진정시키고 다음 날 장례식에 보냈다. 딸이 친구들과 장례식장에 다녀와서 퉁퉁 부은 눈으로 말했다.

“그 장례식장 영정 사진 중에 친구 엄마가 제일 젊더라. 엄마는 오래 살아야 해.”


 딸이 조문을 하고 왔는데도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환하고 선하게 웃는 친구의 어머니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날이 컴컴해졌는데, 검은 옷들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장례식장으로 나섰다. 조문을 하지 않고는 마음이 불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상복을 입은 딸 친구와 남동생 둘, 고인남편나를 맞아주셨다. 고인의 영정 사진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었다. 건강했던 어느 날, 밝은 햇살 아래 햇살보다 더 눈부신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다시 왈칵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애 엄마가 그동안 너무 아파했어요. 이제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쉴 거예요.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면 됩니다.”


 주책맞게 울고 있는 나를 보며 고인의 남편이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세 아이들의 든든한 아빠다웠다. 생전의 병으로 얼마나 고통이 심했을지 짐작이 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짧은 조문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12월의 쌀쌀한 밤기운이 뜨거운 눈물을 식혀 주었다. 슬픔에 벅차 들어갔던 장례식장이었는데, 조문을 하고 나오니 그 슬픔이 조금은 빠져나간 것 같았다.


 장례는 유족들은 고인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고인이 남긴 아름다움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자리인 것 같다. 장례식장은 그저 이 세상에 없어진 한 사람을 '처리'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 사람 생을 떠올리고 모두의 슬픔을 한 곳에 모아 '기억'하는 자리였다.


 누구는 눈물로 고인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육개장을 먹으며 고인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유족을 안아주고, 누구는 찬송을 하고...  장례식장의 풍경은 남은 아이들에 대한 내 마음이 어쩌면 값싼 동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하게 만들었다. 고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보였다. 훌륭하게 살았던 고인은 죽음마저도 자식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육시켰으리라. 산란했던 마음이 조문 후에 정리가 되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3일간의 장례식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보다 장례식을 더 길게 치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갈까 말까 헷갈리는 장례식은 꼭 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장례식은 나에게도 유족에게도 고인에게도 모두가 득이 되는 의식임이 분명하다. 죽음을 통해 삶을 보는 의식이다.

선한 웃음이 아름다웠던 그분이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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