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로 Dec 16. 2021

무엇이, 어디서 부터 잘 못된 걸까?

코로나 단상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이제 2년이 다 돼 간다. 코로나 창궐과 동시에 이사를 온 셈인데 처음 이사 왔을 때, 이 동네의 번화한 상가가 참 마음에 들었다. 매일 상가들을 둘러보며 여러 가게를 탐색해 나가는 소소한 기쁨이 있었다.


 매일 둘러보니 어디에 뭐가 생기고 없어지는지 보였다. 떡볶이 가게가 카페가 되었고, 도넛 가게가 밀키트 집이 되었고, 미용실이 치킨점으로 바뀌었다. 스터디 카페는 세 개나 더 생겼고, 2년 전에는 아예 없던 밀키트 점이 도보 5분 거리에 다섯 개가 생겼다. 새로운 가게가 생기는 만큼 손님이 없는 빈 가게에 멍하니 앉아있는 사장님들의 모습도 눈에 띄게 늘었다.  

 

문을 닫고, 새로 문을 연 가게의 사장님의 고충에 비하면 코로나 시대 내 일상의 제약과 답답함은 아무것도 아닐 것 같다. 정부가 거리두기 단계 숫자를 올릴 때마다, 확진자 숫자가 늘 때마다, 자영업자들의 심장 박동수도 비례해서 올라갈 것이다. 생계가 막히는 그 심정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한여름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도, 아이들이 학교에 못 가는 것도, 여행 한 번 맘 편히 다녀올 수 없는 것도, 모두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성인의 90%가 백신을 맞았다는 요즘, 우리는 희망조차 잃어버린 것 같다. 확진자는 8000명을 넘었고, 병상이 부족해 병원에 가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백신을 맞으면 맞을수록 확진자가 느는 이 기이한 상황 속에서도 정부는 백신 접종 수치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백신을 맞고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그저 ‘호소인’으로만 보고 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 못 되었을까?

  

 청소년 백신 접종 반대 여론이 들끓고 있다. 효과는 보이지 않고, 부작용 사례는 넘쳐나는 이 백신을 맞지 않으면 아이들은 학원을 다닐 수 없다. 임상 사례도 턱없이 부족하고, 향후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백신을 자라나는 아이들의 ‘건강한’ 몸에 주입해야 한다. 아프지 않았던 아이가 병에 걸리고, 죽는 사례가 나타나는 데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포장된다. 그런데도 공교육에 기대를 걸지 않는 부모와 학생들의 약점을 예리하게 파고든 정책이 먹히고 있는지 접종률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상한데,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지탄의 대상이 되는 시대지만,  ‘무증상 확진자’라는 말이 나는 너무 이상하다. 의학 지식이 없어서 이상하게 느껴질런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말이 정말 이상하다.


‘너는 안 아프지만, 사실 너는 아픈 거야. 그러니까 절대로 돌아다녀서는 안 되고, 네 주변의 안 아픈 모든 사람들도 검사를 받아야 해.’

증상이 없으면 안 아픈 거 아닌가? 세상의 각종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투하지만, 우리 몸의 면역력은  그것을 이겨낸다. 증상이 나타나면 치료를 하고, 바이러스의 침투에도 증상이 안 나타나면 안 아픈 걸로 친다. 그런 줄 알고 살았는데, 이놈의 코로나는 예외인가 보다.

 

'무증상 확진자' 주변 사람들은 검사를 받고, 안 아픈 누군가도 ‘무증상 확진자’가 된다. 또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검사를 받는다. 확진자 수가 당연히 늘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안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이 되어 치료를 받는다. 그러는 사이 진짜로 많이 아프고, 병을 이겨낼 힘이 없는 노약자는 병실이 없어서 입원도 못 한 채 죽어가고 있다.


 늘어나고 있는 확진자 수를 보아 효과는 거의 없는 것이 확실한 백신은 ‘돌파 감염’이라는 교묘한 말로 설득한다. 백신을 두 번 맞아도 효과가 없는 것은 돌파 감염된 것이니, 세 번 맞아야 하고, 세 번에도 돌파가 되면 네 번 맞아야 한다는 말을 넘어서 이제 n번을 맞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안 걸릴 때까지 주사를 놓겠다는 심산인데 왜 그래야 하냔 말이다. 백신을 안 맞아도 감염되지 않고, 감염되어도 아프지 않은데 왜 ‘무조건’ 백신을 맞아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코로나에 걸려 죽기 전에 수많은 자영업자들은 생계의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거리두기 3단계, 4단계 입으로 숫자를 내뱉는 정치인들은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지만, 그걸 현장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은 나락으로 몰린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집 앞 피자집 자리에 무인 문구점이 들어선다고 한다. 무인 간판을 달았지만, 유인임이 분명하다. 임대료를 내는 가게 주인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인 간판 뒤에 있을 사장님 얼굴이 환하기를, 오래도록 이 가게가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장례식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