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로 Dec 17. 2021

전업주부 윤 모 씨의 어느 하루

행복한 거 맞겠지?


 겨우 오후 5 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밖이 컴컴하다. 해가 짧아지니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 아니라 열 시간으로 줄어든 느낌이다. 점심을 먹고 치운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둑해졌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졌다. 당연한 자연의 이치인데 어두워진 밖을 보고 있으면 세월이 빨리 가는 것 같고, 내가 빨리 늙어버리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뭔가 뾰족하게 남는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에 내 주름살만 켜켜이 쌓여간다. 내 인생을 가족들에게 바쳤다며 인생이 허무하다는 신세 한탄을 하고 싶진 않은데, 곧 그렇게 될 것만 같다. 마음 한 구석이 자꾸 허전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늘 내가 한 일은 두 번의 끼니를 차리고, 청소를 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고, 식기 세척기에 쌓인 그릇들을 넣었다. 이 일을 하고 힘들었다고 하기엔 나와 함께 일한 기계한테 예의가 아닐 것 같다.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책을 읽다가 졸고, 주식 계좌가 녹는 걸 들여다봤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아이의 간식을 챙겨주고, 몸이 찌뿌둥해 유튜브 스트레칭을 찾아 한 20분 몸을 움직였다. 뭔가를 계속  했는데, 안했어도 하나도 표가 안 날 일이다.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채 날이 어두워졌다. 한 일이 없지 않았지만, 집은 내가 손이 갔던 자국은 남겨두지 않고, 손 가지 않은 부분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딸아이가 학원 갈 때 갈아 입고 간 체육복이 욕실 앞에 구겨져 있고, 아들이 벗어 둔 양말이 소파 밑에 떨어져 있다. 사소하고 작은 손놀림 끝에 살림은 반짝반짝하게 완성되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일거리를 애써 외면한다.


 집 안에 녹아드는 내 시간과 내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노트북을 폈다. 여기에 글이라도 적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없어지고 말 것 같은 날이다.


‘전업 주부’

안온하면서도 지루해 보이는, 더 솔직히 말하면 무능한 내 신분이다. 작가가 되고 싶어 동화를 습작하고, 브런치에 글도 쓰지만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집에서 노는 여자’로 보일 뿐이다.


 누가 보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 싶지만, 중요하다. 인간이 왜 사회적 동물인가? 남의 시선을 미친 듯이 신경 쓰고 살기 때문에 사회적 동물인 거다.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도 누가 뭐라고 하는 것 같은 기분에 절어 사는 게 인간이다.  


 아침 7시에 나간 남편은 저녁 7시에 돌아온다. 들어오자마자 “배고파”가 인사인 그를 위해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나는 배가 하나도 안 고프지만 열심히 저녁 식사 준비를 한다. 저녁 식사 준비는 내가 해야 할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남편을 위해 그럴듯한 저녁 상을 차려 내는 것이 당연한 배려이자 나의 밥값이다. 아침에 일찍 나가는 남편에게 커피 한잔과 빵 한 조각만을 먹여 보낸 게으른 ‘전업주부’의 최소한의 양심이기도 하다.


 '나'로 살고 싶어서 브런치 아이디도 ‘나로’로 정했는데, 하루 종일 남을 위해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그건 아무도 내 노동에 돈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전업 주부의 노동을 금전으로 환산하면 누군가 300만 원 정도라고 했다. 환산만 하지 말고 3만 원이라도 직접 주면 좋겠다. 그러면 ‘전업주부’로 사는 일이 좀 더 신날 텐데 말이다.


 한파특보까지 내린 오늘 같이 추운 날 집에 있는 아이들을 걱정하며 밖에서 동동거릴 직업 주부들이 들으면 화가 날 수도 있겠다. 나도 일하는 엄마로 살아봐서 그 고충도 모르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전업 주부의 배부른 푸념은 여기서 멈춰야겠다.


앞치마를 두르고 전업주부의 존재감이 가장 빛나는 시간을 맞이해야겠다.

그나저나 저녁은 또 뭘 먹나.....

작가의 이전글 무엇이, 어디서 부터 잘 못된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